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허하오터시 (문단 편집) == 상세 ==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후흐허트(Хөх хот)로 [[몽골어]]로 '푸른 도시'라는 뜻이다. 후허하오터는 [[중국어]]식 발음이다. [[왕소군]]의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흉노]] 때부터 도시가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나라]]의 군현제 당시에는 운중군(雲中郡)으로 칭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흉노 세력권이었으며 한 군현은 사실 흉노를 통제하고자 설치한 명목상의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5호 16국]] 시절 탁발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첫번째 수도였던 성락이 되었다.[* 12년만에 남쪽에 있는 평성, 오늘날의 [[산시성]] [[다퉁시]]로 천도해버려서 실질적인 중심지로 작동한 시기는 매우 짧고 영향력도 그리 크지는 않았다.] 오늘날 후허하오터시의 직접적인 기원은 1565년 몽골 투메드부의 [[알탄 칸]]에 의해 세워진 귀화성(歸化城)이다. 우리가 아는 [[귀화]]랑 단어가 같은데 바로 알탄 칸에 의해 [[명나라]]에서 북원으로 '귀화'한 [[한족]]들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귀화성이 위치한 [[오르도스]]의 투메드부 일대는 애초에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척박한 지역이라 한족이 원래 살지 않았으나 알탄 칸이 대원제국의 부활을 외치고 스스로를 중국 천자 자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하며 [[베이징]]을 포위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산시성(산서성)|산시성]], [[허베이성]] 일대를 약탈하며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족들을 잡아다 내몽골로 강제이주시킨 후 한족식 도시를 만든 게 바로 귀화성이었다. 그 덕분에 내몽골 외곽인 에렌호트 등과 달리 후흐허트는 원래부터 한족이 더 많았다. 이후 1571년 알탄 칸이 명나라와 강화를 맺고 순의왕으로 봉해지면서 이 지역의 정세가 안정화되자 귀화성은 명-몽골 국경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크게 번영하였다. 또한 알탄 칸은 말년에 [[티베트 불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귀화성에 수많은 티베트 불교 사원이 건설되어 귀화성을 중심으로 티베트 불교가 내몽골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후 귀화성을 세운 투메드부가 귀화성을 거점으로 명-몽골 국경 무역의 이익을 한동안 독점하였으나 투메드부가 쇠퇴하고 1628년 차하르부의 링단 칸이 귀화성을 차지한다. 그러나 링단 칸이 1634년 병사하고 차하르부와 혼인동맹을 맺고 있던 [[만주족]]의 [[후금]]이 대원제국의 [[옥새]]를 차지하고 만주-몽골 동군연합을 이루면서 귀화성은 후금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후금은 1636년 [[칭제건원]]을 하면서 국호를 [[청나라|청]]으로 바꾸었고 귀화성은 오르도스 방면에서 청군이 만리장성 이남으로 쳐들어가는 거점이 되었다. 이후 [[강희제]]가 외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귀화성 북동쪽에 새로운 성을 쌓고 이를 수원성(綏遠城)이라고 하였고 여기에 [[팔기군]]을 주둔시켜 오르도스의 방위를 맡겼다. 귀화성과 수원성을 아울러 귀수(歸綏), 즉 구이쑤이라고 불리면서 청나라 치하 내몽골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1913년]]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귀화성과 수원성을 정식으로 통합해 구이쑤이라고 하였고 새로 만든 쑤이위안성(綏遠省)의 성도로 삼았다. 1939년 구이쑤이를 차지한 [[일본 제국]]의 [[괴뢰국]]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수장 [[데므치그돈로브]]가 구이쑤이를 몽골어로 푸른 도시라는 뜻의 '후흐허트'로 고쳤고 [[중일전쟁]] 이후 다시 내몽골을 차지한 [[국민정부]]가 도시 이름을 다시 구이쑤이로 바꿨으나 1947년 [[중국 공산당]]이 만든 [[내몽골자치구]]의 수부가 1954년 [[칼간]]에서 구이쑤이로 옮겨온 이후 구이쑤이를 다시 후흐허트로 이름을 고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