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한 (문단 편집) == 역사 == 원래 [[신나라]]가 멸망하고 후한이 나오기 전에 [[현한]]이 있지만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지 잘 언급이 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신나라가 23년에 멸망한 다음에 한나라가 다시 재건이 되었기 때문에 개국이 25년이 아닌 23년이라 봐도 무방하다. 현한 [[경시제|경시제 유현]]의 밑에 있었던 유수는 유현 휘하에서 세력을 키우다 하북 지방에 정착하며 세력을 넓혔고, 25년 6월에는 국가를 건국해 도읍을 [[낙양]]으로 하고 연호는 [[건무]](建武)라 하였다. 그 뒤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하고 유현을 살해한 적미군을 격파하여 관중을 평정하고, 36년에는 [[촉나라|촉]] 지방에서 할거하던 [[공손술]]을 토벌하여 [[중국]]을 통일한다. 통일 후 유수는 신나라의 폭정과 실정, [[군웅할거]]로 인한 전란으로 파괴된 통치 체계와 국가 시스템을 복구하는 한편, 백성들을 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하고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유수는 [[경제(전한)|한경제]]의 6대손이었지만 독자적인 세력이 약하다보니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양]] 인근의 [[호족]]들과 연합 정권을 세웠다. 이는 전한이 건국된 직후에 [[공신]] 세력을 [[숙청]]해서 [[왕권강화|강력한 황권을 확립한 것]]과[* 특히 [[오초7국의 난]]에서 [[황실]]이 [[반란]]을 일으킨 제후국들을 상대로 승리함에 따라 황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달리 호족 세력이 공신으로서 정치에 간여하는 바탕이 되었고[* 이 때문에 후한은 강력한 황권을 가진 전한 때보다 황권이 더 약했다.], 아울러 이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이들이 강성한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원인이 된다.[* 음씨, 등씨 등.] 후한은 환관인 [[채륜]]이 초기 형태의 [[종이]]를 실용성 있게 대폭 개선한 채후지를 만들었고, [[장형(후한)|장형]]이 혼천의와 지동의를 만드는 등 [[문화]]가 매우 번창했다. 또한 [[반초]]가 서역 여러 [[국가|나라]]와의 교역길을 열어서 [[실크로드]]를 다시금 개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4대 황제인 [[화제(후한)|화제]]부터는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이 심해지면서 정치는 점점 혼란해졌으며 사회 전반의 침체가 뒤따랐다. 화제 이후로는 어린 황제가 즉위했다가 일찍 붕어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치적 권위가 불안정해진다. 비록 환관의 정치 개입의 효시가 되었지만 화제까진 전성기였고 거의 후한 중반 무렵인 [[안제(후한)|안제]] 때에는 화희황후 등씨가 임조칭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여러 곳에서 문제는 있었어도 덕정이 펼쳐지고 국가가 안정적으로 돌아갔다. 외척이 문제가 되었던 후한이지만 사실 후한 초중기엔 [[황태후]]들의 정치 참여가 정국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문제가 시작된 때는 안제의 다음 황제인 [[순제(후한)|순제]]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환관과 손을 잡고 132년에 [[양기]]의 여동생 순열황후 양씨를 책봉한 이후부터이다. 그녀가 황후가 된 이후 양기가 [[외척보정]]의 자격으로 [[대장군]]이 되었는데, 양씨 일족은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삼갔던 화희황후 등씨의 일족과는 정반대의 성향으로 황제를 위협하는 권세를 잡고 횡포를 부려 후한 중후기의 정국을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결국 순제가 즉위하고 양씨가 황후가 된 132년부터 [[환제(후한)|환제]] 시절인 159년까지 권세를 농단하던 양기를 제거하기 위해 환제가 손을 잡은것이 환관이었는데, 양기가 제거된 바로 이때부터 환관들이 후한의 정세를 주무르고 [[당고의 금]]을 일으키는 등 사회를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민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후한 조정이 직접 진압할 능력이 없다보니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방관들의 자율성을 크게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각지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쌓으면서 사실상 [[군벌]]화가 이루어졌다. 광역 행정 단위인 주의 장관으로서 감찰의 업무를 업무를 맡은 [[자사(관직)|주자사]]가 임명되었던 초기와 달리 이 시기에는 행정, 군사 등 전권을 행사하는 [[목(관직)|주목]]이 설치되어 이러한 군벌화가 더욱 가속화되었고, 중앙 조정의 영향력은 미미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십상시의 난]]으로 중앙 정치가 혼란스러워지자, 조정의 분란을 명분으로 하여 거의 모든 [[군웅할거|지방관들의 이반으로 국가가 공중 분해되는 대참사가 터지고 만다.]] 이 같은 후한 말기의 상황이 '''[[삼국지연의]]'''의 초반부 배경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