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진타오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후진타오/젊은후진타오.jpg|width=100%]]}}} || || '''청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후진타오''' || 중화민국 장쑤성 타이저우에서 태어났다. 명나라 때 절강순무로 재직하며 [[왜구]] 토벌에 앞장섰던 호종헌의 직계 자손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찻집 주인 겸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나 후진타오가 7살 때에 사망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attachment/후진타오/후진타오가셋.jpg|width=100%]]}}} || || '''젊은 시절의 후진타오와 학생들''' || 1959년 [[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입학했고, 1965년 졸업하고 건설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문화대혁명]]이 벌어졌지만, 하방(下放)[* 쉽게 말해 당, 정, 군 고위직이 [[관료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는답시고 [[시골]]이나 [[공장]]으로 보내 [[체험 삶의 현장]]을 시키는 것이다. 이게 [[전시행정]]에 그쳤거나 일년에 며칠 정도 단기간이면 또 모르겠는데, 완전히 거처를 옮겨서 시골로 보낸 다음에 일부러 방치했다. 사실상의 [[귀양]]이 된 것이다. [[덩샤오핑]]은 물론이고 덕분에 간부와 지식인, 학생 등 '''고등교육을 받은 천만명 가량의 엘리트 계층이 졸지에 시골 깡촌의 [[노동자]]가 되어버렸다.''' 사실 문화 대혁명 당시 하방은 마오쩌뚱이 [[홍위병]]을 이용해서 '자본주의의 못된 물이 들었으니 다시 혁명화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이었다.]되지 않고 1968년 [[간쑤성]]의 류자샤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 자원하여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문화대혁명의 폭풍을 피해갔다. 이후 간쑤성에서 계속 기술공무원으로 경력을 쌓다가 지방 시찰을 나온 [[후야오방]]의 눈에 띄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발탁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external/img.blog.cctv.com/492791_200907260541191.jpg|width=100%]]}}} || || '''장년기 시절의 후진타오''' || 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85년 9월, 중국공산당 2차 전국대표회의[*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아닌 조선로동당 당대표자회와 비슷한 행사.]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1985년 [[구이저우성]] 당 서기로 임명되었는데, 구이저우가 깡촌 오브 깡촌인데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후야오방도 1987년 1월 실각하면서, 사실상 여기가 그의 정치적 성장의 한계점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티베트 지역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승려들의 반중 시위가 이어지자, 1988년 12월 당 중앙은 후진타오를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임명하여 [[라싸]]로 급파하였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단호하게 소요를 진압하면서 강하고 결단력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부상했다. 직접 철모를 쓰고 강경 진압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 [[덩샤오핑]]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크게 만족했고, 이것이 차세대 주자로 치고 올라가는 발판이 되었다. [[덩샤오핑]]의 적극적 지지 속에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 승진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성장 배경을 가진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단원들을 자기 파벌로 삼아 세력을 키워 [[199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2002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맡은 데 이어 [[2003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국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2004년]]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attachment/후진타오/등소평-강택민-호금도.jpg|width=100%]]}}} || || '''후진타오와 [[덩샤오핑]]'''[* [[파일:attachment/후진타오/등소평-후진타오.jpg]]여담으로 사진을 조작하여 뒤에 [[장쩌민]]이 삭제된 사진이 한때 떠돌기도 했지만 해당 사진이 원본이다.] || 일설에 의하면 1992년,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지위를 넘겨주는 대신 차기 국가 주석은 후진타오로 삼아달라고 요구했고, 장쩌민도 이를 받아들여 이때부터 국가주석에 등극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 격세지정이라고 하는데, 차기 최고영도인은 전임이 아니라 전전임이 결정하고 나간다는 원칙. 이는 시진핑의 후계자 선정 때까진 지켜졌으나 시진핑이 종신적 집권을 도모하면서 현재까지도 시진핑의 후계자로 등극할만한 인물은 보이지 않고 있다. 원래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권력의지나 카리스마로 최고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 등의 당지도부의 후원 및 계파간 합의에 의해 최고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집권 내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타협하는 자세로 임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반중 논객의 분석처럼 장쩌민이 뒤에서 수렴청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후진타오의 공청단은 [[상하이방]] 세력보다 당내에 뿌리가 매우 깊고, 특히 상하이방은 60년대생 이후의 세대가 거의 없는 상태로 대부분 노장이지만 공청단은 공산당의 제도상 계속 충원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권력투쟁에서 유리해지게 되어 있다. 러닝메이트인 [[중국 총리|국무원 총리]]([[정부수반]])는 [[원자바오]](온가보温家宝)로 2003년부터 10년간 계속 함께 한 것이 특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