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주 (문단 편집) === 역사 === 곽위는 황제가 되었지만 거병할 때 자식이 모두 살해되어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954년에 죽을 때 처남의 아들인 시영(柴榮)을 양자로 세워 제위를 잇게 하니 이가 후주 [[시영|세종]](世宗, 954년 ~ 959년)이다. 세종은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北漢)과 싸워 승리를 거둔 뒤([[고평 전투]]) 내정에 충실을 기하고 [[군대]]를 정비해 천하 통일의 야심을 품고 [[남당]](南唐)과 북한을 압박하고 [[요나라]]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959년, 겨우 39살에 병사한 뒤 그의 어린 아들인 시종훈이 제위를 잇자, 군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군 [[조광윤]](趙匡胤)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로서 통일 왕조의 초석을 닦은 후주도 겨우 9년 만에 멸망하고, 조씨에 의한 [[북송|송]]이 개창되었다. 그러나 이 오대 최후의 왕조인 후주의 황족인 시씨는 조광윤의 쿠데타 때에 [[선양]]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대귀족으로서 대우받았고, 시종훈 본인도 조광윤의 후한 대우와 보호를 받았다.[* 물론 이 부분은 조광윤 개인이 숙청과 보복의 릴레이를 끊으려고 결정을 내린 것도 크다. 실제로 그는 부하들에 대해서도 피비린내 나는 유혈 숙청을 단행하지 않고 술자리를 연 뒤 정중하게 '부탁' 하여 병권을 넘겨받는 형태로 군권을 모으는 등 최대한 온건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에서 시씨 일족은 남송의 최후의 군대와 함께 항전하여 남송과 최후를 함께했다.[* 소설『[[수호전]]』에 나오는 소선풍 [[시진]](柴進)도, 이런 역사적 사유 때문에 아마 후주 세종의 후예로 그려진 듯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