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이족 (문단 편집) === 수, 당, 송 시대의 해상 교역로를 통한 후이족 유입 === > [[아바스 왕조|대식(大食)]]은 본래 [[사산 왕조|페르시아]]의 땅으로 남자는 ‘심목고비(深目高鼻, 눈이 깊고 코가 높다)’로 검은 수염을 갖고 있으며, 여자는 얼굴이 희고 외출 시에는 얼굴을 가린다. 이들은 하루에 [[알라|천신(天神)]]에게 5배(拜)하고, 은대(银带)에 은도(银刀)를 차며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하지도 않는다. 예배당은 수백 명을 수용하는데 7일에 한번 왕은 높은 곳에 앉아 아래 사람을 향하여 말하기를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하늘에서 태어나고 적을 죽이는 사람도 복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전투에 용맹하다.[[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17_0221_1210|번역출처]] >---- > -『[[신당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무역 상인들이 6~8세기 무렵 중국의 행정력이 당시 잘 미치지 못하던 [[광저우]]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였다. 광저우를 통한 중국과의 해상 교역 루트는 곧 아랍인들에게도 알려졌다. 당나라 때 광저우의 유력자들은 대부분 아랍인 무슬림 혹은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상인 출신이었지만, 이들은 자기 고향의 부녀자들을 데려오는 경우는 드물었고[* 이들과 연관이 깊은 인도의 [[파르시]]들의 유전자를 조사해본 결과 부계 Y-DNA는 대부분 이란에서 기원한 것으로 나왔으나 모계 mtDNA는 6% 정도만 이란에서 기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페르시아인 입장에서 인도보다도 중국이 훨씬 더 이동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중국에 정착한 페르시아인과 아랍인의 성비불균형은 인도에서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대개 중국인이나 동남아시아인 현지처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광저우 루트는 이미 꽤 유명해서 [[탈라스 전투]] 때 아랍군의 포로가 되었던 중국인이 12년만에 이라크에서 광저우로 가는 뱃길을 이용해서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758년 10월에는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이끄는 동남아 출신 해적들이 광저우를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한편 [[안사의 난]] 당시에 당의 요청으로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만수르]]는 4천의 무장 상인들을 파견해 반란 진압을 돕게 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중국 여인과 결혼해 화북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들이 초창기 회족 공동체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878년 [[황소의 난]] 때는 황소의 반란군이 광저우에 체류하던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12만을 죽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 수치는 광저우에 체류하며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통제를 받던 동남아인들까지 포함한 수치로 추산된다. 광저우가 파괴된 이후에는 [[푸젠성]]의 [[취안저우]]가 해상 무역 중심지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취안저우의 [[파르시]]와 [[무슬림]] 상인들이 당나라 남부의 해안 지대의 교역을 장악한 가운데, 신라인들은 [[황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했었다. 당나라 [[신라방]]에 정착한 신라인들과 페르시아인 상인들은 권위 있는 아랍, 페르시아 지리서에 신라가 여러 차례 언급된 것을 보면 상당한 수준이었던 듯 하다. 이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신라인들과 발해인들이 빈공과에 자주 급제했듯이 아랍-페르시아인 중에 능력이 유별나게 좋은 경우에는 [[빈공과]]에 지원해 급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신라인들과 발해인들이 빈공과를 거의 휩쓸다시피 한 것과 다르게 아랍-페르시아계 빈공과 합격자는 한두 명 정도였다.] >왕이 거둬들이는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향기 나는 풀이었다.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곤 했는데 마을마다 아주 높은 가격에 팔렸다. 이를 '차(al-sakh)'[* 오늘날 아랍어에서는 Shay라고 발음함.]라고 부른다. 세 잎 식물보다 잎이 많고 향도 약간 더 강하며 시큼한 맛이 난다. 중국인들은 물을 끓인 다음 잎을 뿌려 넣었으며 모든 병을 다스리는 데 썼다. >---- >-『중국과 인도 여행기』[* 9세기 무렵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무역 상인들의 구술을 편집, 기록한 책.] 후이족들이 처음 중국에 정착하던 시기는 중국에서 차가 대중적으로 유행하게 되는 시기와 겹친다. 광저우의 페르시아인, 아랍인 상인들을 통해 차 문화가 중국에서 중동으로 직접 전파되었다. ||||[[파일:external/www.china-mike.com/china_zheng-he-Giraffe.jpg|width=100%]]|| || 명나라 시대 당시 잡아온 기린을 그린 그림 || > 신종 희녕(熙寧) 연간(1068~1077)에 대식에서 온 자가 [[시박사|번장사(蕃長司)]]의 업무를 통할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광저우]]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 도번수보순랑장(都蕃首保順郞將) 포타파리자(蒲陀婆離慈)가 아들인 마물(麻勿)로 하여금 공물을 바치며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직위를 대신하게 해 달라고 하고 또 장군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마물을 낭장으로 삼았다. ... 대식의 각 부족은 각각 이름이 달라서, 물순(勿巡),[* [[오만]] 동북부에 위치한 알 핫드 서안의 수르 항 인근을 가리킨다.] [[타브리즈]](阤婆離), 유로화지(俞盧和地),[*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서안의 알 카티프] [[말라바르]](麻囉跋) 등의 나라가 있지만, 모두 대식이란 이름으로 대표되었다. >---- > - 『[[송사]]』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20_0490_0050_0140#self|번역출처]] 송나라 때에는 광저우와 [[취안저우]]의 페르시아인, 아랍인 후손 대부분이 한화되었다 하며[* 당나라 항구 도시에 정착했던 신라인 공동체도 한화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해상 무역 패권은 다시 중국인들이 장악했다.] 명목상으로만 무슬림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송나라의 [[시박사]]에서 일하는 등 해상 무역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있는 다른 페르시아-아랍 무역 거점들과 해상 교역을 지속하였다. [[오대십국]]과 [[송나라]]의 황제들은 광저우와 양저우 출신 서역인 후손들 중에 미인이 많다고 후궁으로 선호하였다 한다. 당시 중국인들의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이해도는 매우 피상적이었는데, 심지어 [[메카]]를 붓다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하거나, 메카가 불교도들이 1년에 한 번 순례를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등 잘못된 정보가 널리 퍼져있었다. 중국 해안 도시의 회족들은 명나라 때 [[정화(명나라)|정화]]의 해상 원정에 대거 참여하며 활약한 이후, 명나라 정부에서 해금령을 내리고 인도양 해상 무역의 실세가 무슬림에서 서양인으로 교체되며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한족과 동화되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광저우와 취안저우를 중심으로 한 해상 도시의 회족 후손들은 족보를 통해 자신의 후이족 조상들에게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등 대부분 완전히 한화한 상태이다.[* 하단의 비무슬림 회족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