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이족 (문단 편집) == 판사이 ==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무슬림을 판사이(Panthay)라고 부른다. 이들은 윈난성의 후이족들와 연결되어 있으며, 한 때는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중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19세기 버마로 세력을 확장하던 영국은 버마인들로부터 중국계 무슬림들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윈난성의 후이족들도 판사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원나라 시절 [[윈난성]]을 다스리던 [[부하라]] 출신 [[https://en.m.wikipedia.org/wiki/Ajall_Shams_al-Din_Omar|사이드 아잘 샴숫딘 우마르]](赛典赤·贍思丁)가 같이 온 식솔들을 포함한 무슬림 이민자들과 함께 오늘날의 [[쿤밍]]에 해당하는 지역에 모스크를 세우고 이슬람을 포교하였다. 아잘의 사후 동생 후세인(忽辛), 아들 나스룻딘(納速剌丁; Nasr ad din) 역시 윈난성을 다스렸으며, 중국과 미얀마, 인도를 연결하는 무역로를 확대, 개척하였다. 판사이는 미얀마어로 “[[페르시아인]]”을 의미한다. 쓰촨성과 버마를 육로로 직접 연결하는 무역로는 [[전한]] 시절에도 존재하긴 했으나 원주민들의 무관심으로 규모와 수익이 적어 주목받지 못했다. 원나라 때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무슬림들이 도래하고 나서야 유의미한 규모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무슬림 판사이(Panthays)는 버마와 중국 [[쓰촨성]]을 잇는 무역로를 개척한 원나라 무슬림들의 후손이다. 이들 중 일부는 태국 북부 [[치앙라이]]로도 이주했는데, 오늘날 치앙라이의 중국계 인구 중 3분의 1이 윈난성 후이족 출신 무슬림이라고 한다. 원명 교체기 명나라가 윈난성에서 원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이 과정에서 윈난성의 후이족들은 명나라에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하였는데, 이렇게 포로가 된 대표적인 인물로 [[정화(명나라)|정화]]가 있다. 명나라는 바이족과 나시족의 갈등을 이용하여 윈난성의 [[대리국]] 복원 시도를 무력화하였고, 이 과정에서 원나라 때 무슬림들과 통혼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일부 바이족들도 바이어 대신 중국어를 사용하며 다른 후이족들과 동화되었다. 1853년 윈난성에서는 한족 광부들과 후이족 광부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후이족 수천여명이 학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후이족들이 1855년 두문수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한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할아버지 대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이족 출신 두문수는 소수민족 [[바이족]]과 [[나시족]]의 갈등을 이용하여 바이족을 봉기에 끌어들인 뒤 봉기 참여자를 늘렸다. 후이족 봉기군들은 1856년 대리를 점령하고 [[평남국]]을 건국하였으며 두문수는 술레이만 술탄으로 즉위했다. 평남국 군대는 윈난성의 성도 [[쿤밍]]을 두고 청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두문수는 [[버마]]를 통해서 영국 측에 평남국을 국가로 인정할 것과 평남국을 원조할 것을 요청하지만 평남국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파악한 영국 측에서는 지원을 거절하였다. 1872년 대리가 함락되자 두문수는 음독자살하고 74년부로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버마를 통해 두문수의 난 관련 소식을 듣던 영국은 이 사건을 Panthay Rebellion(판제이 반란)이라고 칭했다. 미얀마와 태국에 거주하는 후이족들의 후손들 중 현재도 이슬람을 믿는 인구는 양국에 각각 7~8천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미얀마의 판사이들의 경우 미얀마의 독립 이후 군부 독재 정권의 소수 민족 탄압을 피해 상당수가 중국 윈난성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에는 가급적 [[대만]]으로 이주하는 상황이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