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이족 (문단 편집) ==== 1980년대 이후 ==== > 1979년 [[이란 혁명|이란 이슬람혁명]] 이전까지 무슬림 후이족들은 중국의 한족들 틈에서 정체성에 대한 특별한 고민이나 문제없이 중국인의 일원으로서 중국 한족 문화에 동화하면서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성공 이후 전통보수주의 이슬람과 급진적 성향의 이슬람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중국의 무슬림들에게 전달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후이족들에게 무슬림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한족과 후이족이 한 마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협력관계를 유지했던 사회적 분위기는 1979년 이후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 > 1979년 이후 무슬림 후이족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는 이슬람의 전통적 보수주의 성향이 점차 강화되었다. 이들의 변화는 식생활에서 이슬람의 깨끗함과 청결을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목격되었다. 이슬람의 [[할랄]](halal: 허용)에 해당하는 이슬람식 생활방식 ‘qing zhen'(pure and true: 청진)을 유지하기 위해 초대를 받아 중국 한족의 가정을 방문하는 회족들은 거의 대부분 해바라기 씨나 과일만을 요구하였다. 이슬람 음식문화의 청결 유지에 대한 보수적 입장과 점증되는 이슬람식 식습관의 유지 노력은 후이족과 한족 사이의 상호 교류와 의사소통을 제약하고 접촉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다. 1979년 이후 무슬림 회족들의 종교적 활동 강화와 보수주의적 생활방식 유지는 1958년 중국 공산당의 종교제도 개혁조치 이후 폐쇄되었던 [[모스크]]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제한된 종교 활동에도 활력을 제공하였다. 이후 무슬림 후이족 사회에는 다양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예배에 참석하는 무슬림 숫자의 증가, 이슬람 종교의식의 철저한 준수, 그리고 이슬람 교육의 강화였다. 1979년 이후 모스크 합동예배에 참석하는 무슬림의 숫자는 점차 증가하였으며, [[라마단]] 단식 기간 동안 각 무슬림 가정에서는 적어도 1명 이상이 단식을 하였다. 교육적 측면의 변화는 이슬람 교육기관인 마드라사 교육의 활성화였다. 1979년 이후 공립학교 입학생 수는 감소한 반면, 모스크에 딸려 있는 코란을 가르치는 사립 [[마드라사]]에 입학하는 학생 수는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무슬림 후이족의 아이들은 학교 공부보다 집이나 모스크에서 코란을 공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무슬림 후이족 아이들이 공립학교보다는 모스크 부설 코란학교를 선택하는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1982년에 중국 이슬람의 작은 메카로 알려진 [[간쑤성]] 헤조우(Hezhou)에서는 공립학교 학생 수의 비율이 78%에서 50% 이하로 떨어졌다. 무슬림 후이족들이 자식들을 공립학교에 보내길 주저한 이유는 중국어나 영어 등 주요과목을 공부해 봤자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미래의 희망도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을 마친 무슬림 후이족들은 한족들에 비해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현저히 낮았다. 후이족들에게는 공교육보다 농업, 수공업 등 가업에 종사하거나 코란과 아랍어를 공부하여 이슬람 관련 직업이나 이맘이 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 > 중국 문화혁명 기간 동안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담배와 음주는 1979년 이후 후이족 사회에서 금지되었으며, 후이족 여인들은 [[히잡]]을 쓰도록 요구받았고, 젊은 남녀의 만남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한편 한족들과의 결혼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일단 후이족과 결혼한 한족 여성은 무슬림으로 개종해야 했다. 중국 사회 내에서 무슬림의 숫자가 증가한 원인은 한족의 개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무슬림의 이주와 상호결혼관습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 > 무슬림 후이족 사회의 보수주의화에 대한 중국 당국의 반응은 신중했다. 후이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중국 당국은 과거와 같은 강압적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후이족 사회의 장점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여전히 회족 사회의 종교적 원리주의 현상을 걱정하였으며, 덩샤오핑 이후 중국 공산당의 30년 작업이 불과 수년 만에 물거품으로 변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중국 당국은 후이족들에게 이슬람 전통에 근거한 후이족의 인종적 관습 유지를 허용하였고, 종교와 민족성을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하였지만, 후이족들은 두 개념을 결코 별개의 개념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이슬람은 후이족들의 정체성 확립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21811|KCI 등재 논문 : 위구르족, 회족 무슬림의 정체성과 문화접변 양상 연구]]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은 자국 내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이란에서처럼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발언권을 늘려주기 시작하는데, 이는 중국 이슬람 사회를 비롯한 세계 이슬람권이 보수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 역시 이란 호메이니 정권 수립 이후 자국 무슬림들의 봉기를 우려해서인지[* 이란의 [[호메이니]]는 위구르 무슬림들에게 중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봉기할 것을 요구하였던 바 있다.] 이슬람 관련한 제약을 상당 부분 완화하였다. 원래 중국에서는 종교의 전도 행위가 불법이지만 후이족들이 이를 무시하더라도 그렇게 크게 제재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종교 행위에는 정부도 그다지 간섭하지 않는다. 지금도 닝샤나 간쑤에 가보면 가보면 모스크가 곳곳에 있고, 나름 기도시간마다 많은 무슬림들이 와서 기도를 올린다. 이런 곳은 이슬람 우세지역이기 때문에 [[라마단]]도 엄격히 지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단식후 모스크에서 공동식사를 하기도 한다. 또한 중국은 공산화 이후 장례에서 [[화장(장례)|화장]]을 법제화했지만, 후이족은 이슬람교 전통상 화장이 금기시되기 때문에 후이족에게 이 법률은 해당되지 않고, 매장을 주로 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중국 내 무슬림들이 해외와 교류하는 것을 상당부분 제한하고 있다.[* 중국 내에서 해외교류가 제한되는 것은 [[이슬람]] 뿐만 아니라 [[정교회]]를 제외한 [[기독교]] 종파들도 마찬가지다. [[가톨릭]]의 경우 [[교황청]]의 임명권을 배제한 채, [[중국천주교애국회|중국 내에서 독자적으로 국가가 주교를 임명하고 있다.]] 다만 [[2000년대]] 들어와서는 물밑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한 후에 임명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 정부가 임명한 중국의 가톨릭 [[주교]]들이 아예 교황청의 눈밖에 난 사람들은 아니라는 이야기.] 오늘날의 [[쿠란]]의 [[표준중국어|중국보통화]] 번역판이나 중국 내 이슬람 교리는 이슬람과 [[중화사상|중국 애국주의]]가 절충된 형태의 번역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이 번역본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인증하고 보급하는 중국어판 번역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보급하는 한국어판 번역본은 지나치게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다. 비무슬림 전부를 '''불신자'''라는 살벌한 단어로 표현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불필요한 의역이 많다. 다른 한 편에서 보면 부인이 말을 안 들으면 “살짝” 때리라던지, 적의 목을 “때리라”같은 어설픈 번역으로 한국 이슬람계 내외에서 엄청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사실상 보급이 중단되었다.] 학문적 입장에서는 논란일 수도 있겠지만, [[반종교]] 정서가 있는 중국에서 이슬람이 별문제 일으키지 않고 공존하려면 어쩔 수 없는 타협이기도 하다.[* 중국은 종교 계열이 주도한 [[민란]]으로 나라가 혼란해졌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중국 내 종교들을 다소 빡빡하게 감시하는 편이다. [[여호와의 증인]]과 [[파룬궁]]은 중국에서 아예 해체되었다.] 일단 후이족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중국인 및 외국에서 온 무슬림과 통혼한 한족으로 구성된 민족이기 때문에 일반 중국인 비무슬림들과 무조건 척을 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명장 [[바이충시]]가 중일전쟁에서 맹활약한 역사가 있기 때문인지, 오늘날 후이족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중국과 대만의 후이족은 각각 청나라나 일제강점기 때보다는 후이족에 대한 종교 차별과 억압이 줄었다며 비교적 만족하는 분위기이다.[* 청나라 때는 만주족을 제외하고 한족 뿐 아니라 후이족도 변발을 강요당하거나, 현재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팔기군]]들이 위구르족과 후이족을 학살하기도 했다. 모스크 입구에 “황제만세 만만세”라는 간판을 강제로 걸도록 하는 모욕적 조치 때문에 후이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었다.][* 일제강점기 때 대만은 이슬람이 완전 사멸한 적이 있으며,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의 청진사들을 부수고 후이족들을 학대하여 중국 내 무슬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후이족들은 이슬람 국가와 중국 사이에 외교에서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칭하이성과 윈난성을 개발하고, 소수민족들과 한족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 우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여담으로 중국의 유명 축구선수 [[우레이]], [[장린펑]] 전 중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인 [[가오훙보]]도 후이족이다. 오늘날 후이족들은 한족에 비해 중국 내에서 학업 성취도가 비교적 떨어지는 대신에 주로 축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고위 정치인 중에서 후이족은 찾기 힘들지만 [[지린성]] 출신의 후이량위 (回良玉)가 2003 ~ 2013년간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며 농업, 민족, 종교 분야에서 활약한 바 있다.[* 다만 2006년 유엔 안보리의 북한 제재에 찬성하였기에 방북 시에 냉대당하였다. 그외에 후베이성, 안후이성, 장쑤성 등에서 성장이나 당위원회 서기 등을 맡는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