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이족 (문단 편집) === 현대 === || [[파일:332BE1DF-2A75-4324-93FC-269F9A1F7428.jpg|width=470]] || || [[오르도스]] (어얼둬쓰) 시의 모스크 || [[신해혁명]]후 마씨일족은 군벌로 성장하여 마가군을 이끌었고, 이들은 다른 군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지를 독립왕국처럼 다스렸다. 비교하자면 신장성의 경우 한족 군벌([[진수런]] 등등)이나 관료들이 위구르인에 대한 몰이해나 혐오로 위구르인들의 봉기를 조장했던 것과 다르게 서북 지역의 후이족들은 같은 후이족 군벌들의 통치를 받는 상황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은 이슬람권에서 [[이슬람 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이슬람 모더니즘의 영향이 같은 시기 신장에서는 이슬람 모더니즘이 [[위구르/역사#s-5.1|위구르 민족주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면, 후이족 사회 내에서는 그동안 지하드를 주장하던 자흐리야 [[수피]] 교단 등의 약화로 이어졌다.[* 이슬람 모더니즘은 반수피 개혁 운동을 띄고 있었다.] 후이족 군벌들은 국민당정부에 복속했고, 국민당 정부의 편에 서서 이 근처로 [[대장정]]을 해온 홍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장궈타오]]가 지휘한 홍 제4방면군은 이들과의 전투에서 궤멸적으로 참패하고, 거의 전멸한 끝에 지휘부만 [[옌안]]에 겨우 도착한다. 공산당은 마씨일족에 반대하는 회민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들을 자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한족 병사들이 후이족 마을에서 이슬람 관습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여러 주의를 주었다. 1946년 이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후이족 군벌 마홍규가 지휘하는 마가군은 [[후쭝난]]군에 편입되어 공산당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지만, 이후 전세는 역전되었고, 후이족 군벌은 공산당에 투항하거나 대만으로 망명해서 거의 100여년간 이곳을 지배하던 마씨일족의 왕국은 해체되었다. 이후 마씨일족의 영지는 [[닝샤 후이족 자치구]]로 개편되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국공내전 종료 이후 국민당 군에 소속된 후이족과 위구르인 약 2만여 명이 대만으로 피난하였는데, 이들은 오늘날 대만 무슬림 인구의 직계 기원이 된다. 이들이 대만에 유입되기 전 일제강점기 당시 대만에서도 소수의 후이족 인구가 있었으나, 일제가 이슬람을 강경 탄압하면서 사멸된 상태였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에는 “사회주의 국가는 약소민족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소수민족의 자치를 강조하는 레닌주의 교리 때문에 그다지 탄압이 심하지 않았으나,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는 공산당의 정책 + 중국 내 반종교 정서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 또한 심각한 수준의 박해를 받았었다. 이 당시 이맘들은 홍위병에게 폭행당하고, 당연히 모스크에 모여 기도를 드리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에 반발한 [[윈난성]] 거주시의 샤덴마을의 후이족은 1975년 반란을 일으켰고 군부대를 습격해서 무기고를 털어 무기를 탈취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베이징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 진압군을 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모스크를 파괴하여 1,6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4인방]]이 몰락한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 정부는 1979년 이에 대해 사과하고 모스크를 재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