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스 (문단 편집) === 국민정부 시절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0px-Hu_Shi.jpg]]|| || 1940년의 후스 || 초기에는 다른 많은 중국 지식인처럼 자본주의와 의회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었고, 1926년 [[소련]] 여행에서 [[영국]]보다도 소련을 본받아야 한다며 소련을 고평가하기도 했다. [[미국]] 여행 중에는 중국에서 서구식 정당 정치가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0년대 초반에 호인정치를 주장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고도 중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1925년 [[선후회의]]에 참석한 것 때문에 [[중국공산당]] 총서기 [[천두슈]]는 후스를 무력통일론자 [[우페이푸]], 연성자치론자 [[천중밍]]과 더불어 개량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인물이라고 혹독하게 깠다. 원래부터 계급투쟁에는 반대하던 후스였기 때문에 1938년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반공주의]] 사상가로 거듭나 당시 대다수 [[중화민국]]의 청년 및 지식인들과 달리 [[중국공산당]]에 적대적이고 [[중국국민당]]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1929년 라는 논문을 발표해 서양화를 주장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있자 세계화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성공하여 베이징이 함락되고 [[동북역치]]를 통해 중국 통일이 완수된 이후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훈정을 실시하자 인권 보장을 위한 법적 보장이 없는 체제라고 혹독하게 비판했으며 [[중원대전]] 중에 장제스에게 약법 제정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이런 비판을 의식하여 중원대전 막바지인 1930년 8월 약법 제정을 주장했고 1931년 약법제정을 강행하다가 [[후한민]]과의 의견충돌로 [[탕산 사건]]을 일으키는데 이는 [[1차 양광사변]]으로 이어졌다. 30년대에 중국 지식인계에 발생한 독재와 민주 논쟁에서 민주헌정제를 지지했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현대화만이 중국을 살릴 길이라 인식, 그 현대화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은 장제스 정권뿐이라 여겨 1935년 8월 장제스가 헌정과 다당제를 실시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장제스를 지지했다. >"모든 사회적 급진주의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절대 권력만이 근본 개혁이라는 과제를 성취할 수 있고 오직 폭력, 무제한의 공포적인 전제주의만이 완전하게 현존 질서 또는 그 재현을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 >1941년의 발언. [[중일전쟁]] 발발 이후 초기에는 [[저우포하이]], [[천궁보]], [[천부레이]], [[타오시성]], 가오쭝우 등과 함께 저조구락부를 조직하여 화평을 주장했으나 [[왕징웨이 공작]]을 비롯한 매국적 밀약은 거부했다. 1938년부터 4년간 주미 중화민국 대사를 지냈고 1945년부터 [[베이징대학]] 총장이 되었다. [[옌시산]] 내각이 출범하자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미국인이 온다면 빵도 있고 자유도 있을 것이고. 소련인이 온다면 빵은 있지만 자유는 없을 것이다. [[중국공산당|그들]]이 온다면, [[대약진 운동|빵도 없고]] [[문화대혁명|자유도 없을]] 것이다." >美国人来了,有面包,有自由;苏联人来了,有面包,无自由;他们来了,无面包,无自由。 >---- >베이징에 남아달라는 공산당의 권유를 거부하고 베이징을 탈출하면서 남긴 말 [[국공내전]] 당시 중국공산당은 후스를 합류시키기 위해 상당한 공작을 하였으며, 후스의 제자 우한[* 이후 베이징 부시장을 지냈으며 [[만력제]]의 능 발굴사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해서파관 사건]]으로 참혹하게 조리돌림당했고 후스는 그걸 보고 길을 잘못 들었다고 논평했다.] 등을 파견하여 후스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후스는 '과거는 잊고 베이징대학 총장도 계속 맡게 해줄테니 베이징에 남으라'는 마오쩌둥의 권유를 뿌리치고, 베이징 함락 직전 [[난징]]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탈출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후스를 '문화 제국주의를 추종하는 반동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규정하고 혹독한 비판을 퍼부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후스는 [[장제스]], [[쿵샹시]], [[쑹쯔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동으로 취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