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삼국시대 (문단 편집) == 후대에 미친 영향 == 왕건은 왕권 전제화에 광적으로 집착했던 궁예를 쫓아내고 임금이 되었기에, 자신을 임금 자리에 앉히는데 도움을 준 호족들을 왕건 본인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후삼국시대 내내 전국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반복해 유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최소한 왕건이 살아있을 때의 고려 왕권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마치 중세 프랑스 왕이 자기 직할지에 있는 영주들을 순회하며 간혹 손을 봐주듯 왕건은 전국 곳곳을 몸소 혹은 대리인을 보내서 순회하며 말을 듣지 않는 불순한 호족은 처벌하거나 그 세력을 흡수하고는 했다. 즉 여러 호족 중에 왕건 세력이 단연코 강했고 여럿이서 연합해도 왕건에게 대들 힘이 있는 호족은 없었다는 뜻이다. 후삼국통일 이후에 호족의 권한은 실로 막강했다지만 그건 호족들 자체가 강해서 왕실이 속수무책이었다기보다는 왕자들 간 권력다툼에 외척으로서 개입할 딱 그 정도 선까지만 강했다는 뜻이다. 4대 임금 [[광종(고려)|광종]] 때의 궁예보다 강도가 심하고 기간도 긴 호족 탄압으로인해 호족들은 문벌 귀족으로 모습을 바꾸거나 지방의 향리가 되었다. [[불교]]적으로는 신라 왕실 중심의 [[교종]]을 대신해서 호족들이 섬기기 편한 [[선종(불교)|선종]]이 융성했으며, 중앙집권적이었던 신라 때에 비해서 후삼국시대는 전국 호족들이 자기 지역이 이런저런 이유로 명분이 있고 잘났다고 주장하기 위해 [[풍수지리|풍수지리설]], 도참설 등도 발달했다.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도 정치적 명분 쌓기에 풍수도참설을 내세우곤 했다. [[육두품]] 세력들이 지배층 주류에 편입된 시기, 즉, [[골품제]]가 무너진 시기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 중간에 [[발해]]의 멸망으로 그 중 [[발해유민|일부 잔존 세력]]이 고려로 망명하기도 했다. 발해는 [[거란]]을 상대로 요동에서 10여년간 잘 싸우다가 부여성이 함락된 직후 상경용천부로 쳐들어온 거란군에게 왕 [[대인선]]이 항복하면서 급작스레 멸망한 데다 고려는 후백제와에 전쟁으로 이들을 도울 시간적, 군사적 여유가 없었다. 대신에 왕건은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유민들을 후대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거란]])를 [[만부교 사건|적대하는]] [[훈요 10조#s-2.5|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발해의 멸망은 한창 후백제와 대립하던 고려 측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고려로 남하한 발해의 잔존 세력으로 인해 고려의 군사력 및 행정력에 필요한 인적 자원들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