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삼국시대 (문단 편집) === 중기 (918년 ~ 927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말여초(918).png|width=100%]]}}} || || '''{{{#fbe673 918년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 직후 판도 }}}''' || 왕건이 고려를 세운 직후만 해도 후백제는 고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서로 볼모를 교환하는 등 평화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던 [[상주시|상주]] 세력가 [[아자개]]가 고려에 항복(918)했고[* 그는 다름 아닌 '''견훤의 아버지'''였다.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왕건이 직접 마중나가 맞이했다는 구절 등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견훤이 패전을 거듭했던 [[대야성 전투]]에서 마침내 승리하자(920), 왕건은 견훤이 신라로 더 진격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구원군을 보내어 고려와 후백제는 본격적으로 관계 악화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조물성 전투]]에서 양군이 맞서다가 화친하기도 했다.(924-925) 그러나 신라의 [[경애왕]]이 계속 친고려적 태도를 취하고 후백제가 보낸 인질인 견훤의 생질 진호가 돌연히 죽으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포로로 와있던 왕건의 6촌 동생 왕신도 보복 살해당했다. 2차 전쟁 초기에는 후백제가 유리하였다. [[웅주]]를 취해 [[충청도]] 전역에서 우세를 점하고, 견훤이 친정하여 [[서라벌]]을 점령해 경애왕을 죽이고 왕건의 군대를 [[공산 전투]]에서 격파하는 등 그야말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다(927). 또한 그간 친아버지 아자개를 의식하여 상주 일대는 후백제군이 아무래도 손을 뻗지 않았던 것 같지만, 적어도 927년도 이 당시에는 견훤의 인내심이 끊겼는지 기어이 군대를 진격시켜 상주와 문경 일대를 후백제령으로 확정짓는다.[* 이 시기에 아자개가 세상을 떠나 있었거나 혹은 살아 있었어도 견훤이 더 이상 참아주지 않기로 모질게 마음 먹었든지,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다만 둘 중 어느 쪽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후 아자개의 이복 동생들이 성씨를 견씨로 바꾼 걸로 봐선 후백제가 아자개 집안을 나름대로 꽤 우대했을 개연성은 높다.] 그 후에는 [[나주 공방전|나주를 탈환하고]](929) [[예성강 전투]]를 벌여 고려의 수도를 위협하면서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932). 한편 이 시기 신라의 경우, 경애왕 때에는 고려와 손을 잡고 후백제를 물리치려 했고 927년에는 고려군과 신라군이 연합하여 후백제의 용주성을 함락하기도 했다. 또한 대야성은 그 전에도 신라가 2번이나 자력으로 방어에 성공하기도 했고, 추화산성의 손긍훈도 여러차례 후백제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견훤이 공들여 준비한 일격인 경주 습격 이후에는 견훤의 체계적인 국가 체계 파괴 공작[* 무기 만드는 대장간을 파괴하고, 장인 및 숙련병을 모조리 압송. 임금을 죽인 것도 큰 충격이지만 이것도 상당한 여파였다.]으로 그나마 유지하던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모두 잃었다. 이후에는 그저 후백제와 고려의 실질적인 [[괴뢰국]]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