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삼국시대 (문단 편집) === 발생 배경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말여초(891).png|width=100%]]}}} || || '''{{{#fbe673 891년 호족의 난립 }}}''' || [[통일신라]]가 성립한 이후, 신라는 220년 이상 [[전성기]]를 누렸지만, 말기로 접어들면서 [[진골]] 귀족들 간의 끝없는 왕위쟁탈전으로 점차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하는 것을 느낀 전국의 지방관과 [[호족(한국사)|호족]]들은 반란을 일으킬 욕망을 품기 시작했다. 9세기 후반 들어서, 후삼국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에도 이미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874년 이찬 근종(近宗)이, 879년에는 일길찬 신홍(信弘)이, [[정강왕]] 때인 887년에는 지금의 [[경기도]] 지방인 [[한주]]에서 김요(金蕘)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도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신라의 [[금군]](禁軍)[* 금군은 [[국왕]] 직속의 [[친위대]]를 의미하는 말인데, 신라 정부군 중에서 정예 부대를 투입한 듯 하다.]이 신속히 출진해 단기간에 토벌했기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반란의 불씨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신라 정부의 위신과 질서는 위태롭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즉위한 [[진성여왕]] 시대에는 지방 통제력 약화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서 [[서라벌]]의 [[국고]]는 텅 비었고, 관리를 보내서 농민들에게 세금을 독촉했는데, 오히려 이것에 농민들이 격분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주요한 반란은 [[사벌주]]에서 일어난 [[원종·애노의 난]]이었는데, 신라 정부에서는 장군 영기(令奇)를 사령관으로 보냈지만 영기는 [[똥별]]이었던지 반란군의 군세를 보고 겁을 먹어 제대로 싸우지 않는 졸전을 벌였고 그 와중에 촌주 우련이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다. 진성여왕은 영기를 처벌하고 우련의 아들에게 포상을 했지만 이미 신라 정부군의 위엄은 곤두박질쳤고, 해볼만한 싸움임을 깨달은 지방 세력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혼란 속에서 두각을 갖춘 몇몇 세력들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국가]]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점차 옛 삼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통성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옛 백제 땅에 [[견훤]]이 건국한 후백제, 옛 [[고구려]] 땅에 [[궁예]]가 건국한 태봉, 그리고 대야성([[합천군]])마저도 나중엔 후백제에게 빼앗기고 [[금성]]([[경주시]]) 등의 [[경상도]] 일부 지역만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신라로 나누어지게 된다. 신라 김씨 왕조는 [[헌강왕]] 때만 해도 안정기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동생 [[정강왕]]이 왕위에 오르고 1년 만에 죽자, 이번에는 [[여동생]] 진성여왕이 올랐다. 그러나 진성여왕 때부터 지방반란을 통제하지 못했고 이에 후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설상가상|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라는 속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후계자가 없었던 진성여왕은 출생도 미묘한 헌강왕의 [[서자]] [[효공왕]]을 왕위에 올렸다. 효공왕도 후사가 없어서 그의 사후 박씨 왕조로 교체되고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아달라 이사금]] 이후, 김씨를 대신해 733년 만에 박씨가 왕위를 계승([[신덕왕]])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게다가 신덕왕도 단 5년만 재위하고 아들 [[경명왕]]이 계위했으며, 경명왕 2년에 김씨의 반격이 있었지만 진압당했다. 하지만 경명왕도 7년 만에 죽어 [[경애왕]]이 올랐는데, 후백제의 침공 이후로 경애왕이 살해되고 김씨가 왕위를 되찾은 것도 김씨의 암묵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래도 신라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일 수 없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경주의 신라인들은 아무리 지방 통제력을 일거에 잃었을 망정 200년 이상은 통일 [[삼한]]을 잘 다스린 정통성과 경험이 있었고, 박씨 왕가가 구원 투수로 나선 경명왕 때부터는 기회를 잘 엿봐가며 가능한 수단은 뭐든 해보려 했으며 그래도 경북 동쪽 절반 일대에서는 세금 징수, 인력 징발 등 그럭저럭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견훤이나 궁예가 월등한 무력으로 삽시간에 구축한 통제력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래도 지방의 어중이떠중이 호족들보다는 물적 지배력이 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