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삼국시대 (문단 편집) == 특징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말여초(890).png|width=100%]]}}} || || '''{{{#fbe673 890년까지의 통일신라 판도 }}}''' || 이 시기 할거한 국가들의 이름이 삼국시대와 같은 이유는 백제나 고구려가 멸망한지 이미 2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각지에는 삼국의 유민의식을 간직한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 200년 동안 유민 의식의 표출 시도가 거의 없었으므로 일단 반란으로 세력을 만든 뒤에 그럴듯한 명분상 이름만 빌린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 구 고구려 및 백제 영역에는 고구려 및 백제 유민의식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사료들이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통일신라 시기 황해도나 패서 지역(개성 등)의 호족은 실제로 고구려계 호족들로써 신라가 직접 지배하지 못했고 간접 지배로 만족했다. 그리고 옛 백제 일대는 신라가 전력투구해서 직접 지배했으나 그 와중에도 8세기까지는 유민 의식의 잔존이 확인되고, 게다가 신라의 지배력이 9세기 즈음 약해지자마자 맥이 그간 끊겨 있던 백제식 불상이 갑자기 우후죽순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관찰된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려면 지배국이 진압하지 못하게 실력을 갖춘 다음 캐치프레이즈를 대놓고 거는 것이지, 누가 어떻게 동조할지 사전에 미리 알고 깃발부터 일으키는 부흥운동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고려 시대에 이런 식의 삼국부흥운동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세계사적으로도 이런 사례는 드물지 않다. [[중동]]이나 [[유럽]] 같은 데선 고구려나 백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세월인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민족 집단은 허다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영국 옆의 아일랜드의 경우 무려 '''800년'''이나 지배를 받았고 고유 언어도 사멸되어가는 와중에 정체성을 지켜서 독립했고, [[아시리아인]]은 나라를 잃은 지 26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과 이스라엘 또한 각각 1000년, 2000년간 타 민족의 지배를 받았으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끝내 독립을 쟁취했다.] 또한 지방에서의 봉기 시, 망국의 국호를 쓰려면 그전에 먼저 유민 의식부터 있어야 할 수 있다. 물론 야심 있는 지방 세력가가 이용하기에 상당히 좋은 명분이고 또 실제로도 그렇지만, 이런 시도라도 아주 기초적인 공감대와 불을 불일 계기 및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심이 전혀 없이 뭔가 숭고한 정체불명의 애국심만으로 상하가 똘똘 뭉쳐 반기를 든 일은 동서고금에 전혀 사례가 없다. 대표적으로 견훤이 건국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의자왕]]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궁예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나라가 멸망하고 평양이 황폐화되었다며 고려[* 사서에 나타나는 후고구려는 구별을 위한 표기며,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의 국호가 고려로 바뀌었다. 이 사람은 아예 신라 왕자란 전승이 있있는데 이게 사실이면 견훤보다 더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국호를 정하고 신라를 멸도라고 부른다. 궁예는 신라 지역, 견훤은 정작 상주 가은현 즉 현재의 경북 [[문경]] 출신이므로 각각 고구려, 백제 유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본인에겐 유민 의식이 없더라도 그가 차지한 땅의 사람들이 유민 의식이 있으니 그 유민 의식을 자극하고 이용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옛 고구려, 옛 백제인들의 유민의식에 궁예, 견훤의 야심이 호응 및 동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정복 국가는 정복지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지 않게 멸망시킨 나라의 왕족 관리 및 지방 세력가 포섭에 공을 들이기에, 많은 세월이 지나 부흥 운동이 벌어져도 결국 그 주모자는 오히려 정복 국가 체제에서의 실력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신라인들은 한반도 의식 통합을 이런저런 정책으로 시도했지만 통합 정도는 여전히 부족하여 삼국 공통의 시조는 [[남북국시대]] 내내 등장하지 않았고,[* [[기자(중국)|기자]]가 있었지만, 기자는 현대의 연구가 아닌 당시 기준으로 봐도 동방의 문명화를 상징했지 시조 같은 존재라고 보긴 어렵고 고구려 때부터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듯이 신라가 딱히 더 부각시킨 존재도 아니다.] 삼국 공통의 시조인 [[단군]]을 본격적으로 강조하게된 것은 고려 시대부터였다.[* 비슷한 경우로 [[금나라]]와 [[청나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금이 멸망하고 금의 중심 세력이었던 완안씨 황족이나 중앙 귀족들은 학살당하거나 숨어살게 되면서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고 중심 세력과 한참 떨어져 방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변방 호족급의 [[여진족]]들이 [[원나라]]와 [[명나라]]의 지배 하에 복속되어 근근히 [[여진족]]의 정체를 이어갔을 뿐이었다. 금의 부흥을 기치로 들었던 [[천명제|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선조들 또한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라는 [[명나라]]의 지방관직을 대대로 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