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삼국시대 (문단 편집) == 전쟁과 판도 == 삼국시대 이상으로 전장과 전선이 방대하다. 여기서 판도도 삼국시대보다 작은데 어째서 전선이 방대한게 말이 되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후백제, 고려, 신라 전선 지역은 맞닿은 지역 전부가 언제 상대편에 붙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전장에서 배신이 수시로 일어났다. 이 때문에 상시 수비와 감시를 병행할 주둔군이 필요했고, 동시에 나주, 경남, 경북 지역 등 동시다발적인 전투도 잦았다. 또한 삼국시대에서도 수십만 단위로 군을 움직인 것은 고구려 뿐이고 이 대군마저 삼국 간의 전쟁에선 동원되지 않았다. 수만 단위 전투들마저 삼국시대의 경우 대개 수백년간의 시간동안 간간히 일어난 것에 비해 후삼국시대의 유명한 전투들은 약 35년동안 동시다발적으로 치른 여러 전투가 많았다. 가령 [[일리천 전투]] 당시 참전한 양군의 병력을 합치면 10만명 넘는데 이는 전근대 '''한국사 내전중 최대 규모'''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 에서 이를 제대로 재현했는데 공산 전투 에피소드 쯤에 고려와 신라의 군대가 백제 신검의 군대가 주둔한 백제 대야성을 노리거나 또 근시기에 수군을 보내 우회기동시키는 등 짧은 시기에 여러차례 군대 이동을 시켰으며 견훤은 이를 틈타 서라벌 습격을 벌였다. 동시에 왕건도 이를 깨닫고 5천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간다. 대야성 공략 부대를 이용한게 아니라 다시 동원해서 쳤으며 수군 이용도 마찬가지다. 일전이 아니라 전시에 동원된 병력으로 보면 삼국시대 전투를 연상시키는 수만 단위에 들어서게 된다. 당연히 이를 막는 측도 상시 그를 막기 위한 병력들을 주둔시켜야 한다. 실제 이후 통일한 고려는 전선이 줄어들고 시간적 여유가 생겨 고려초 준비 끝에 [[여요전쟁|거란과의 전쟁]]에서는 수십만 단위의 병력을 운용한다. 사실, 오늘날처럼 모든 지역에 행정권이 미치게 된 것은 [[조선]] 시대 들어서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기준으론 동원력이나 인구도 작다고만 볼 수도 없다. 견훤에게 경남 합천의 [[대야성]]을 잃고, [[고창 전투]](930) 이후 [[안동]] 주변부까지 고려 영토가 되고 나서는 신라의 영토는 건국 당시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삼국사기만 봐도 [[왕건]]이 [[포항]] 쪽에 성을 쌓고, [[경순왕]]은 [[경주시]]와 그 주변만 겨우 다스린다고 할 정도. 포항이면 경주에서 고작 3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자전거를 타도 2시간이면 간다. 말 그대로 내 앞 마당까지 남의 영토가 된 것. 그러나 세계사의 많은 왕조가 마지막 5년 정도는 실권을 완전히 잃고 허울뿐인 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런 신라의 상황이 특이한 사례는 아니다. 이성계에 장악당한 [[고려]]나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조선]], 군웅할거가 발생하고 서구의 반식민지가 된 [[청나라]]의 멸망 직전 상황은 신라와 다른 의미로 비참했고, [[동로마 제국]]이나 [[무굴 제국]], [[동주]] 등도 신라와 비슷하게 멸망 직전 시기에는 수도 근처만 간신히 통제 가능한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