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드(순양전함) (문단 편집) == 실전과 최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비스마르크 추격전)] [[파일:attachment/Sinking_of_HMS_Hood.jpg]] [youtube(nnAA3VjxHE4)] [[VS놀이|Hood vs. Bismarck]](자막 없음) 후드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대서양에 진입한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전함)|비스마르크]]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의 신예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동음이의어)|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함께 출격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스마르크와 같이 행동하는 독일의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이 쏜 8인치 탄을 맞아서 작은 화재가 발생하면서 비스마르크에게 절호의 사격목표가 되었다. 이로 인해 후드는 곧 관측탑에 직격을 받았다. 그 직후 비스마르크의 포탄이 후드의 선회 기동시 드러난 흘수선 밑의 [[수중탄|취약지점]][* 상식적으로 흘수선 밑부분으로의 명중탄은 보통 설계의 큰 고려대상이 아니어서 비스마르크의 럭키샷(?)은 후드 내부의 7인치 장갑판이 보호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교묘히 관통했다 ]을 뚫고 들어가 탄약고에 명중하며 유폭[* 목격자들에 따르면 마스트 부분에서 유폭이 일어났다. 탄약고 위치로 볼때 15인치 포탄이 아닌 4인치 부포탄들의 유폭에 제일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 .][* 4인치는 구경상으로 100mm에 가까운 탄이다. 현용 구축함들의 주포인 5인치 함포보다 딱 1인치 적은 함포인것이다. 그리고 빠르게 쏘는것이 주 임무인 부포의 특성상 대량의 부포탄들이 탄약고에 적재되어있다. 거기에 해당 탄약고의 위치는 함체의 중앙이면서 동시에 후미의 3번포탑의 탄약고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해당 탄약고가 유폭하게되면 함체 중앙에 유폭이 일어나는 셈이고, 거기에 유폭으로인해 바로 옆의 주포탄약고도 같이 휘말려 유폭이 될 수 도 있었던것이다.], 후드는 순식간에 단 3명의 생존자만을 남기고 폭침당한다.[* 여담으로 두 동강이 나서 수직으로 가라 앉을때 1번,2번 포탑이 가라 앉기 직전에 비스마르크를 향해 마지막 발포를 하였다. 그것도 수직상태로 침몰하고 있을때다.] 원래는 생존자가 더 살아있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저체온증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승조원인 테드 브릭스의 증언에 따르면 폭침을 당하고 두동강이나서 침몰할때까지 홀랜드 제독과 랄프 커 함장은 브릿지를 지키고 있었다고한다.] 살아남은 3명의 생존자들도 침몰한지 2시간뒤에 현장에 도착한 구축함 일렉트라에 의해 구조되었다.[* 후드가 침몰한뒤 3명의 생존자들은 각자 물에 뜨는 부유물에 하나씩 올라가서 서로 잡고 버텼다고 한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비스마르크에게 공격당하느라 생존자를 구조할 여유가 없었고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도 공격하느라 생존자를 구조할 여유가 없었다. [[파일:external/1f2f6364280f35316f93eabbfeb152a0b8c0cc9e04fbbde2507e2fa5a54a23a4.jpg]] 생존자 1 테드 브릭스(Ted Briggs)(1923~2008). 신호수병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해군에 복무하였고, [[6.25 전쟁]]과 [[제2차 중동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이후 [[CPO]]로 진급했다가 1955년에 늦깍이로 장교로 임관했고, 1973년에 대위로 전역했다. 이후에 HMS 후드 협회 1대, 3대 회장을 역임하다가, 2008년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테드 브릭스가 해군에 입대한 계기가 어릴적 자신이 살던곳 항구에 정박한 후드의 모습에 반해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훈련을 받고 첫 배치를 받은곳이 후드였다.] || [[파일:external/padresteve.files.wordpress.com/tilburn411.jpg]] || [[파일:external/www.hmshood.com/BobTilburn.jpg]] || 생존자 2 로버트 틸번(Robert Tilburn)(1921~1995). 장포수병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1952년까지 해군에 복무했다. 한동안은 배를 못타고 육상에서 근무 했다. 이후에 HMS 후드 협회 2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1995년에 사망했다. [[파일:external/padresteve.files.wordpress.com/dundasw.jpg]] 생존자 3 윌리엄 던대스(William Dundas)(1923~1965). 소위[* 승선당시에는 사관후보생] HMS 후드 협회에 따르면 생전에 후드 침몰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한적이 없었다고 한다.[* HMS 후드 협회 홈페이지에도 던대스에 관한 정보는 많이 없었다가, 던대스의 딸이 전기 정보를 제공해줘서 정보가 이전보다 많이 추가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해군에 복무하였으며,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1958년에 소령으로 전역했으며, 전역 후에는 [[밍크]][[농장]]을 운영하다가, 1965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목격자들은 그 큰 군함이 나뭇잎처럼 팔랑거리더니 두 동강이 나서 가라앉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순양전함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드러난 것이다. 더불어 동행한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A, Y 포탑이 말썽을 일으켜 제대로 된 사격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함교 부근에 명중탄을 맞아 함장은 무사했지만 지휘부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 사망 13명와 부상 9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여 대영제국 굴욕의 산 증인이 됐다. 대영제국의 자존심이라 불리우던 후드가 비스마르크의 킬카운트로 전락하고 신예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는 비보를 접한 영국 해군은 한동안 [[멘붕]] 상태에 빠져 있다가... '''[[비스마르크 추격전#s-2.6|이내 충격은 모두 분노로 바뀌었고, 매우 분노한 영국 해군은 전함과 순양함은 물론, 구축함과 잠수함, 심지어 항공모함까지 대서양의 가용 가능한 모든 군함들을 비스마르크 하나를 잡으려고 집결시키게 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후드의 허망한 최후는 영국 해군의 소극적 공격도 한 몫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스마르크 추격전 전초전 때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을 먼저 발견하고 선제 공격을 할 수 있었음에도 전력 공격을 하지 않는 소극적 공격을 하다보니 탈출을 우선시하는 것을 거부한 비스마르크 승무원들이 반격할 틈을 만들어줘서 침몰을 자초했다는 내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