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난성 (문단 편집) == 역사 == [[춘추전국시대]] 때까지는 한족의 영역이 아니었다. 원래는 여러 남방 민족의 영역으로 묘족, 투자족, 둥족, 야오족도 여기 살았다. [[후베이성]] 지역에서 발원한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가 이곳을 병탄하면서 중국 초나라 영역으로 들어왔다. 사실 후베이도 [[관중]], [[중원]]에 비하면 변방 취급이었고 초나라 사람도 반쯤 중국인 반쯤 [[남만]] 취급이었지만 여기는 초나라 땅 안에서도 더욱더 변방 취급이었다. 하지만 장강 이남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곳은 남북조시대까지도 거의 개발되지 않은 미지의 남방영역이었다. [[항우]]가 [[초의제]]를 쫓아낼 때도 이곳으로 유배보내듯 보내버렸다. [[삼국시대]]에는 [[형주]] 남부에 속했다. [[적벽대전]]이후, [[형주 공방전]]에서 [[유비]]군이 [[금선]], [[한현]], [[조범]], [[유도]] 4태수를 토벌하는 에피소드에 나오는 남형주 4군 장사, 영령, 무릉, 계양은 모두 이곳에 있거나 혹은 이곳을 포함한 곳이다. 그리고 삼국지에서 [[사마가]]가 왕으로 나오는 [[무릉만]] 같은 남방 야만족들이 바로 이곳을 거점으로 했다. 남북조시대에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장강 북방을 점유하자 이곳에 피난온 한족들에 의해 이곳도 중국화가 점점 진행되기 시작했다. 당나라 멸망후 [[5대10국]]시절에 남초(또는 마초(馬楚))국이 이곳을 중심으로 세워졌다가 단명하였다. 원나라 시절에 성(省)이 설치되면서 이곳은 지금의 [[후베이성]], [[광시 좡족 자치구]] 등과 합쳐 호광성이라고 했고, 명나라 대에 광시성이 분리되어 후베이성-후난성 일대로 축소되었고, 1723년 후광성이 후베이성과 후난성으로 분리되었다. 남북조시대 이래 한족이 주류가 되었으나, 남방계 민족과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명나라와 청나라시대에 대대적인 [[묘족]]의 반란이 있었으나,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특히 명나라 시기에서는 포로로 잡힌 묘족 남자아이들 수천~수만명을 [[거세]]하여 내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태평천국의 난]] 시절에서는 이곳의 [[의병]]으로 구성된 상군이 태평천국 진압에서 대활약을 하고, 이곳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증국번]], [[좌종당]]이 청나라의 실세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탄옌카이]]가 정권을 잡았으나 [[계축전쟁]]과 [[호국전쟁]], [[호법전쟁]]을 계기로 토착 군벌인 [[상계군벌]]을 빼고도 [[북양군벌]], [[계계군벌]], [[월계군벌]] 등이 모두 개입하여 깽판을 치다가 1921년에 [[우페이푸]] 휘하의 [[자오헝티]]가 정권을 잡았다. 1923년 [[탄옌카이]]와 [[자오헝티]] 사이에 후난성의 패권을 두고 [[담조전쟁]]이 일어났으나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은 자오헝티가 승리했다. 이때 담조전쟁에서 활약하여 세력을 키운 [[탕성즈]]가 1926년 자오헝티를 몰아내고 후난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예카이신(葉開鑫, 섭개흠)의 반격으로 축출되었다. 탕성즈는 [[중국 국민당]]에 합류했다. 이후 국민혁명군 8군 사령관 겸 전선 총지휘로 임명된 탕성즈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북벌군을 거느리고 후난을 점령해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이후 우한 국민정부의 거점이 되었다가 [[영한합작]] 이후 난징 국민정부가 지배했다. 탕성즈는 안하무인으로 나대다가 국민정부에게 토벌되었고 이후 후난군벌 [[허젠]] 등이 이곳에서 실력자로 군림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탕성즈를 토벌했던 [[계계군벌]]이 위세를 떨쳤으나 장제스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루디핑]], 담도원 등 상계군벌들을 지원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계계군벌이 [[후난 사건]]을 일으키면서 [[1차 장계전쟁]]이 터지게 된다. [[마오쩌둥]]의 고향이자 1927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추수폭동]]을 일으켜 최초로 봉기한 곳이기 때문에 공산당 입장에서도 중요하다. 마오쩌둥은 봉기 후 참패했지만[* 애초에 러시아 혁명의 전훈에 집착하여 도시 공격에 집착한 [[취추바이]] 노선의 실패라고 보는 것이 맞다.], 패잔병을 이끌고 산악지대인 후난성-장시성 경계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고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다. 후난성 바로 아래인 장시성의 루이진(서금)에 본부를 둔 마오쩌둥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갈수록 성장하였으나, 1934년 [[제5차 초공작전]]에 패해 공산군은 중국을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면서 [[산시성(섬서성)|산시 성]]으로 도피하였고, 이것이 [[대장정]]이다. 당연하겠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로는 관광지화가 진행되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고, 개혁개방 이후로는 아예 마오쩌둥 기념품이나 요리를 파는 식당들도 많이 생겨나서 샤오산이나 징강산 일대에서 관광업으로 벌어먹고 살 정도이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일본군이 만주에서 버마까지 보급로를 뚫으려는 대륙 타통 작전을 실시하여 창더(상덕)가 격전지가 되기도 했다. [[국공내전]] 중에는 후난성 정부주석 [[청첸]] 등 상계군벌들이 장사기의를 일으켜 후난을 마오쩌둥에게 바치면서 최종적으로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