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정옹주 (문단 편집) === [[억울한 죽음]] === 효정옹주는 순창부사 조침의 아들 조의정을 [[부마]]로 맞이하여 가례를 올렸고, 1544년(중종 39) 2월 15일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출산 나흘 뒤인 2월 19일 [[산욕열]]에 걸린 옹주의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졌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중종은 즉시 의원과 [[의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효정옹주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중종은 효정옹주의 위독함을 늦게 알린 정황이 수상하다며 조의정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중종실록 102권, 중종 39년 2월 19일 무자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3902019_004|#]]] 당시 실록을 보면 조의정을 두고, "의정은 연소하고 성질이 광패하여 비첩(婢妾)을 사랑하다가 여러 차례 견책을 받았으나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옹주가 죽기 4-5년 전부터 첩실을 두고 음란한 짓을 하므로 중종도 이 사실을 알고 조의정을 여러 번 문책했었다.[* 하지만 옛날부터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중종의 입장에서는 효정옹주와 조의정을 이혼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조의정을 죽여서 딸을 과부로 만들 수도 없으니 꾸짖고 녹을 주지 않는 것 이상의 다른 방도가 없었다.] 오죽하면 중종은 "부녀자로서 질투가 없는 것은 진정이 아니다" 라고 말했지만[* [[칠거지악]]이라고 하여 여자가 하지 말아야 할 7가지 중에 질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죽하면 질투 좀 하라고 말할 정도로 중종의 눈에 딸이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효정옹주는 질투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조의정을 두둔하는 입장이었다.[* 일설에는 옹주의 외모가 너무나도 박색이어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인지 확인 가능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효정옹주의 사망으로 상황이 변했다. 중종은 정원에 전교를 내리면서 조의정의 죄를 밝히고 추고하게 했다. 반대로 조의정의 공초 내용을 보면 시종일관 본인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이 사건을 대조해보면 이렇다. * 여종 풍가이를 첩으로 삼고, 분수에 넘치게 대우했다. * 옹주가 먼저 풍가이는 첩으로 삼을 만 하다고 말했고, 풍가이를 대할 때 다른 여종들을 부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또 옹주가 스스로 첩 삼는 것을 허락하여 조금도 투기하지 않았으므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더욱 잘해주었다. * 풍가이를 집에 몰래 숨겨두었다. * 풍가이는 임인년[* 1542년(중종 37)을 말한다. ]에 벌을 받고 함흥으로 가게 되었는데 중도에서 도망하여 순창의 농막에 의지하고 있다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 집에 몰래 숨긴 적은 없다. * 옹주의 병이 위독하게 되어서야 알렸다. * 옹주는 출산하고 건강 상태도 좋고 밥도 잘 먹었다. 그런데 19일부터 기침이 잦고 구토를 하므로 백방으로 약을 구해서 썼다. * 옹주의 유모와 여종들을 모두 내보냈다. * 옹주의 유모는 "금년에 액운이 있어 다른 곳에서 거처해야겠다" 하였으므로 말릴 수 없었고, 여종들을 내보낸 건 부마의 집은 돈 들어갈 일이 많은데 지난 5월에 파직되어 녹을 받지 못해서 절약하느라 그랬다. * 옹주가 출산할 때 외조모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 전혀 그렇지 않으며, 집안의 노비들을 불러서 물어보면 모두 진실을 알 것이다. * 옹주가 절명해서 숨길 수 없어 그제야 죽음을 알렸다. * 대궐에서 의녀를 보낸다고 해서 옹주랑 같이 기다렸다. 옹주가 갑자기 죽어서 증명할 길이 없다. * 풍가이가 벌을 받게 되자 다른 여종과 바꿔치기해서 숨겼다. * 옹주가 먼저 풍가이를 첩으로 삼으라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해서 바꿔치기를 했다. 나중에 상황봐서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다. * 승전내관을 사칭해서 어명을 위조하고 채압(彩鴨)[* 채색한 암수 한 쌍의 오리 모양 조각상으로 [[일본]] 사신이 바친 물건이다.]을 가져갔다. * 옥계수[* [[세종(조선)|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해군(1435)|영해군]]의 손자이자, 길안도정 이의의 아들로 이름은 이필숙이다. 참고로 [[황진이]] 때문에 들어봤을 "청산리 벽계수야"의 그 벽계수랑 형제 관계다.]랑 어려서부터 친했는데, 그의 집에 갔다가 채압을 보고 신기해서 빌려달라고 했더니 안 빌려줬다. 그래서 장난 한 번 쳐봤다. * 예전에 임금이 문책하는 글을 써서 내렸는데 버려두고 나가버렸다. * 그때 그 글은 절대 버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간직하면서 펼쳐보면서 반성하고 후회하고 있다. 중종의 의지는 강력했다. 결국 조의정은 고신을 빼앗기고 원하는 곳에 부처하게 하였으며, 풍가이는 장 100대를 맞고 풀려났다.[* 장 100대는 죽을 확률이 매우 높은 처벌이다. 유배는 여인이기 때문에 돈을 내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하였다.] 사실 중종은 풍가이를 사형시키려고 하였으나 조의정의 지시로 첩 노릇을 했다는 점 때문에 정상참작되어 사형을 면한 것이다. 특히 풍가이는 미천한 신분이었음에도 뭔가 비범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국문이 진행되면서 많은 신하가 풍가이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손가락이 하나 없어서 이유를 물어보니 "어머니가 아플 때 끓여서 약에 타서 먹였다"고 이야기하자[* 이것은 보통 효도의 일종으로 여겨져서 이 정도의 행적이면 국가공인(?) 효자가 되어 정문, 복호를 받을 수 있었다.] 풍가이를 감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들끓었다.[* 유교 문화에서는 [[군사부일체]], 즉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윗사람에게 불충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풍가이의 어머니를 향한 효심이 곧 효정옹주를 향한 충성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특히나 풍가이도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백을 하지 않는 바람에 이 확신이 굳어진 면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