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장세자 (문단 편집) === 추존 === 죽은 지 10년도 더 지나서 갑자기 효장세자는 '승통세자(承統世子)'라는 칭호를 얻었다. 게다가 영조는 죽기 전에 세손에게 효장세자를 추존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정작 세손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무덤은 잡초가 무성하도록 방치한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어쨌건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는 '''진종(眞宗)'''이라 했다. 현빈 조씨도 남편이 추존되자 [[효순왕후]](孝順王后)가 된다. 무덤도 정조가 새로 왕릉의 격식으로 만들었고 비명(碑銘)까지 정조가 직접 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고 겨우 10살에 죽은 큰아버지 겸 양아버지에게 감정 이입이 될 리도 없었고[* 진종은 정조는커녕 사도세자가 태어나기도 몇 년 전에 죽었다.], 영조의 유언만 아니었으면 저렇게도 안 했을 것이다. 실제로 새로이 만든 왕릉도 직접 보면 왕릉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반세기쯤 지나고 [[철종(조선)|철종]]이 조선을 다스릴 때쯤에 이르러서는 사도세자에 대한 조정의 인식이 변화함에 따라 정조가 진종의 양아들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친아들로 여겨졌다. 정조가 진종에게 출계한 것이 법적으로 확고했다면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을 사도세자의 장남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나, 『은언군 신도비』에서는 그를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신의 법적 조상을 추존할 때 황제의 고조부 자격으로서 황제로 추존된 이는 정조의 양아버지인 진종이 아니라 친아버지인 사도세자였다. 이렇게 사도세자는 고종의 법적 4대조이자 정조의 친아버지로 인정받으며 장조(莊祖) 의황제(懿皇帝)로 추존되었고, 진종은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즉위한 뒤에야 비로소 소황제(昭皇帝)로 추존되었다. 이때 [[헌종(조선)|헌종]]과 [[철종(조선)|철종]]도 함께 황제로 추존되었는데, 이는 황제의 조상 자격이 아니라 그저 장조와 항렬이 같거나 낮은 모든 왕들을 황제로 일괄 추존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장조, 정조와 달리 묘호도 ‘조’로 승격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