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장문황후 (문단 편집) == 평가 == >'''조모 태황태후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위업은 없었을 것이다.''' - [[강희제]]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는 아들 순치제가 사망했을 때 재빠르게 히오완예이를 황제로 추대해서 혼란을 막았다. 앞서 홍타이지가 갑자기 쓰러져서 깨어나지 못했을 때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아 십수일간 도르곤과 호오거의 기싸움이 벌어지고, 다이샨의 아들과 손자의 목이 달아나는 사태까지 빚어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깔끔한 정리였다. 비록 순치제가 예수회 선교사의 조언에 따라 자금성의 천연두 대유행 때 천연두에서 안 죽고 살아남은 히오완예이를 후계로 삼으라 유지를 남겼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개국공신 친왕들이 건재한 상황에서 황제가 어린아이를 후계자로 남기고 요절하였으니 황권은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였다. 그런 위기에서 효장문황후는 중심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사태를 수습하며 황실의 수장으로서 강희제를 보호했다. 그 후로 효장문황후는 보정대신들에게 정치 실무를 맡기고 어린 황제의 교육을 맡아 강희제가 빠른 시간에 제왕학을 패스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얼추 성장한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하며 오만한 보정대신 [[구왈기야 오보이]]를 처분함으로서 강력한 황권을 얻어놓고도, [[삼번의 난]]으로 다시 갈팡질팡하자 천고일제로 거듭나기 이전 철이 덜 든 강희제를 굳게 잡아주며 손자의 멘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숭덕제|청나라의 세력을 크게 일군 황제]]의 부인이며, [[순치제|청 최초로 중원 진출에 성공한 황제]]의 어머니였고, [[강희제|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룬 황제]]의 조모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청나라 때 궁녀들은 화려한 치장을 할 수 없었고 옷, 신발, 화장법, 머리 장식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고 까다로운 제한을 받았는데, 이것도 바로 효장문황후가 직접 정한 규범이었다. 궁궐에 소박하고 검소한 풍토가 자리잡게 하고, 궁궐 사람들 간의 쓸데없는 말썽을 막으며, 궁녀가 모시는 주인에게 예의를 다하도록 기풍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정해둔 소박하고 검소한 풍토가 [[건륭제]] 치세와 [[서태후]]의 섭정기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풍토로 바뀌었다. 특히 서태후의 사치는 건륭제의 사치마저 능가할 만큼 심각해서 훗날 서태후의 섭정기 이전이 배경인 청나라 사극에서 서태후 섭정기의 화려한 청나라 의상이 나오는 고증 오류가 생기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