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장문황후 (문단 편집) === 태황태후 시절 === 순치제가 죽고 효장태후의 친손자인 히오완예이가 즉위하여 [[강희제]]가 되면서 태황태후에 책봉되었다. 효장태황태후는 순치제가 급서하자 재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고 황궁을 굳게 닫았는데, 이때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보위를 둘러싸고 황궁에서 쟁탈전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히오완예이를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어 청의 혼란을 막은 공이 크다는 평을 받는다.[* 앞서 홍타이지 사망 직후 팔기들과 황제 친위세력간의 내전을 막후에서 조정하던 사람이였이며, 순치제 사망쯤에 다음 후계자로 강희제를 세우는데 사실상 주도하던 사람이였으니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녀는 강희 연간 여러 차례에 걸쳐 존호를 받으며 소성태황태후(昭聖太皇太后)로 불렸다. [[1679년]] [[증손]]자 옹정제가 태어나자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1688년(강희 27년)에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시호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로 추존되었다. 1723년(옹정 원년)에는 증손자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언에 따라 그녀를 소릉(昭陵)에 묻지 않고 새로운 능인 소서릉(昭西陵)에 안장하였으며 지덕(至德)이라는 시호를 가상하였다. 그 후 고손자 [[건륭제]]는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순휘(純徽)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생전에는 노조종(老祖宗)으로 불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