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명제 (문단 편집) == 상세 == 제8대 세종 [[원각|선무제]]의 차남으로 510년에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선무영황후 호씨]]였다. 호씨는 자귀모사 제도에 따라 장남을 낳고 일찍이 살해당해야 했으나 남편인 선무제의 결정에 따라 살 수 있었던 북위 역사상 최초의 황제의 생모였다. 이후 호씨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 원후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을 펼쳤으며 이 시기의 권세로 인해 오늘날 '영태후' 혹은 '호태후'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대대로 누적된 [[중국화|한화정책]]의 피로와 남편 선무제에 이어 불교에 심취해 국가 재정을 낭비하는 영태후 호씨에 대해 북변 6진의 선비족 군벌들의 불만이 쌓여갔고, 급기야 낙양으로의 천도로 원래의 수도였던 평성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던 6진의 세력이 기울자 524년 이들의 불만이 기어이 폭발하여 반란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이 바로 '''[[육진의 난]]'''이었다. 이때 토벌에 앞장섰던 [[이주영(북위)|이주영]] 등 이주씨 혈족들과 그의 부하들이었던 [[고환(남북조시대)|고환]], [[우문태]] 등이 이끄는 군벌이 급성장했다. 육진의 난이 진압되자 이제 영태후 호씨의 전횡을 막기 위해 효명제는 암살을 기도하고, 이주영의 힘을 빌리고자 했으나, 이를 알아챈 영태후가 선수를 쳐서 친아들인 효명제를 독살했다. '''즉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려다가, 어머니가 선수를 쳐서 아들을 죽이는 개막장 상황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후 영태후는 [[효명제의 딸]]을 황제로 세웠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손자뻘인 [[원조(북위)|원조]]로 바꿨지만 곧 효명제의 밀명을 받고 온 이주영에게 잡혀서 영태후와 원조 모두 황하에 던져저 살해되었다.('''하음의 변''') 숙종 효명제의 능호는 정릉(定陵)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