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각민황후 (문단 편집) === 만주국의 황후로 === [[만주사변]] 발발 후인 1931년 말, 푸이가 [[일본 육군]]으로부터 '대청제국의 부흥인 신국가([[만주국]])'의 황제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것을 수락, [[톈진]]을 탈출해 [[만주]]로 이주한다. 정원에서 푸이가 떠났음을 안 완룽은 푸이로부터 "만주로 와 달라"는 청을 받지만, "황후의 신분을 찾을 의사도, 남편의 품으로 돌아갈 의사도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관동군의 명을 받은 [[카와시마 요시코]]가 "황제가 [[다롄]]에서 죽었으니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고 속여 만주로 끌고 갔다. 푸이가 2년간의 집정을 거쳐 1934년 3월 1일, 황제에 즉위하자 완룽 또한 황후가 되지만, "완룽이 황후에 적합치 않다"고 보는 관동군의 뜻에 따라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고천례 의식에도 즉위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같은 해 6월 7일 방만 중이던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의 훈장 전달식 때도 [[관동군]]은 완룽을 알현시키기 싫었지만, "전달식에는 황제·황후 모두 참석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따라 예외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완룽은 훈일등보관장 수상의식에도 그 후 연회에도, 심지어 12일 치러진 만주국황제의 초연 자리에서도 구설수에 올랐던 것과는 달리 아편중독 증세를 보이지 않고 건강한 모습 그대로 의례에 임해 연회의 여주인 역을 맡았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폐쇄적인 생활과 황후로서의 행동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편]]에 대한 의존은 심화되어, 1935년경에는 새로운 의류를 구입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푸이의 아이가 아닌 여아를 [[출산]]한 것도 이때. 놀랍게도 완룽의 친오빠가 일본군에게 이권을 얻는 대가로, 여동생이자 황후인 완롱이 일본군 장교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묵인했다고 한다. 정실황후 완룽이 일본군 장교의 [[사생아]]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푸이는 완룽이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그 아이를 화로에 던져 '''죽여버렸다.''' 또한 완룽에게는 아이가 잘 크고 있다며 거짓말을 하고 숨겼다. 푸이가 아이를 화로에 던져 죽인 사실은 초판 자서전에는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기록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기를 태워죽여버린 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행위로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일이기 때문이다.] 푸이가 사망하고 한참 후에야 밝혀졌다.[* 푸이가 아이를 죽인 이유로는 질투심도 있을 것이고, 아이가 일본에 정략적으로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엉뚱한 씨를 받은 이 아이가 청나라 장손 노릇 하는 것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완룽은 [[1946년]]에 [[아편]]에 빠져 병사할 때까지도 자신의 아이가 오빠의 주선으로, 시골의 평범한 집에서 자라고 있는 줄 알았고 매달 자신의 오빠에게 양육비를 건넸다고 한다. 푸이의 동생 푸제의 아내인 [[사가 히로]]는 "1937년 가을 무렵, [[아편]]중독의 영향으로 완룽의 식사 모습에 이상 징후가 있었다"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만주국 말기에 완룽의 모습을 본 사람들에 따르면, 그녀는 누더기나 다름없는 헐벗은 옷을 입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화장]]은커녕 세수조차 하지 못했으며, [[아편]]중독과 건강치 못한 생활로 시력을 거의 잃어 자력으로 일어설 수 없었다고 한다. 정신착란을 겪고 있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푸이는 손도 대지 않고 오히려 이혼과 폐위를 생각했다고 한다. 푸이는 이 시기 완룽과 이혼까지 생각했으나, 일제가 완룽의 후임으로 일본인 여자를 집어넣으려는 걸 알자 그만두었다.[* 사실 청나라 황실은 푸이의 조상인 [[숭덕제]] 치세에 [[보르지긴]] 가문으로부터 [[몽골 제국]] 대칸위를 찬탈한 바 있으니, 몽골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업보를 치르다 만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