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희(조선) (문단 편집) === 사직 반려 === [[파일:attachment/황희/retirement.jpg|width=500]] [[우용곡]]이 그린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 패러디 만화. * [[1431년]](세종 13)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이 당시 이미 연 68세였다.] (이하 음력 날짜) * [[1432년]](세종 14)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 같은 해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1435년]](세종 17)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 [[1436년]](세종 18)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1438년]](세종 20)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 [[1439년]](세종 21)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같은 달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 [[1440년]](세종 22)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 [[1443년]](세종 25)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 [[1449년]](세종 31) 10월 5일 황희를 영의정부사로 그대로 치사(致仕, 벼슬을 두고 물러남)하게 하다. * [[1452년]](문종 2)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卒記/사망). [[세종(조선)|세종]]은 황희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부려먹었다.[* 비슷한 사례로는 세종이 정말 죽을 때까지 부려먹은 [[조말생]]이 있다.] 영의정이 된 1431년부터 시작해서 1449년에 은퇴하기까지 장장 20년 가까이 은퇴 반려를 당했고, 황희가 최종적으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1449년 10월은 세종이 세상을 뜨기 딱 4개월 전이었다. 게다가 황희가 모친상을 당했을 땐 당연히 치러야 하는 3년상조차 못 하게 하고, "[[환갑]] 지나면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좌상이 풀만 먹다가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고기를 먹으라"고 명령을 내린 바 있다. 결국 황희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 반찬을 먹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11월 27일]](신해)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11027_002|#]]]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이고, 실제로는 세종이 황희를 정치적으로 두둔해준 것에 가깝다. 황희가 정승을 오래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당시 주변에선 시기나 질투가 있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황희가 사직서를 내면 세종이 거절하는 모습을 연출하여 "황희는 벼슬에 욕심이 없는데 내가 막는 것이다."라고 불만 여론을 잠재운 것이지, 정말로 황희가 사직하고 싶은데 일부러 거절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디까지나 현대의 유머스러운 해석일 뿐이다. 세종은 누구든 의지가 없는 신하를 등용하지 않았다. 애초에 의지 있는 신하는 오래 등용하고, 은퇴를 원하면 수락하는 것이 조선의 유교 문화였으므로, 그냥 태종이나 영조가 즐겨 쓴 [[양위]] 쇼 같은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 그래서 현재 이 밈이 쓰일 때는 이 점까지 고증해서 "처음 몇 번은 쇼가 맞았지만 나중에는 진짜 은퇴하려고 한 것"이라는 식으로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 상술하였듯 [[세종(조선)|세종]]이 사망하기 4개월 전까지 관직에 있었으니,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다. 물론 사명감이 높아 오랫동안 자리에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임용한]]은 재밌는 해석을 내놓았는데, 현대에 와서 재벌 회장이 일이 너무 바빠 새벽에 일어나 빵 먹고 출근하면 그걸 불쌍하다고 할 사람이 있느냐, 오히려 재벌이면 그 정도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나며, 황희도 따지고 보면 국무총리 같은 사람인데 이 사람이 정년 찼다고 바로 등 돌려서 퇴직하는 게 맞냐며 황희도 국가의 중요 인물로서 자리를 비워선 안 되고, 너무 오래 해먹는다는 신하들의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황희는 사직서를 내고 세종이 넌 아직 더 일 하라며 사직서를 반려해, 세종이 황희를 부려먹는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황희를 보호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기복(起復) 제도라 하여 특별한 경우에 3년상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법이 있었다. 무조건 3년상을 치러야 되는 비합리적인 예법이면 백성들부터 수긍하고 넘어갈 리가 없었다. 더욱이 조선 시대에는 3년상을 치러도 복직에 대한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3년상을 치르려고 내려가는 관리도 많았다. 건강 문제로 사직을 청하면 아예 [[재택근무]]를 하라고 한 달에 두 번만 조회에 참석하라고 하든지, 서류 업무는 집에서 관료들을 불러서 누워서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다. 원래 전임자인 [[이직(조선)|이직]]은 영의정이었다가 본직에서 물러나고 부원군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했는데, 나이가 많아져서 출근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국정에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직은 본직에서 물러나고 나서도 여전히 영의정 [[대우]]였다. 그런데 황희는 공신이 아니어서 작위가 없었으므로 본직에서 물러나면 정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현직에 그대로 두되 출근 규정을 조정해 준 것이다. 하지만 이 이직조차 황희보다 딱 1살이 많은 1362년생이었다. 그리고, 황희에 가려져 그렇지 이 이직도 유능한 대신이었고 황희와 마찬가지로 죽기 전까지 부려먹었다. 세종이 예순 넘어 은퇴하려던 이직을 마찬가지로 부려먹었고 결국 이직도 죽기 1년전인 1430년까지 일해야 했다. 그런데 이직도 당시에서 꽤 장수한 만 69살까지 살았거늘 68살이던 황희를 계속 부려먹은 것이다. 그만큼 일을 많이 했는데도 평소에 건강 관리에 힘썼다. 평소에 양 눈을 번갈아 감았다 떴다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자기 나름대로의 [[시력]] 관리법이었다고 하며[* 물론 현대 의학 기준으론 전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부등시]]의 위험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백발 홍안의 신선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야사(역사)|야사]]에는 황희가 째려보면 사람이고 어린아이고 동물이고 다 쫄게 만들어서 심지어는 죽어버리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황희가 실록에서는 대단히 강직한 스타일로 묘사되는 것이나 6진 개척과 [[여진족]] 정벌에서 활약하고 다이아 수저 [[수양대군]]과 맞섰던 [[김종서(조선)|김종서]]도 황희를 무서워해서 그 앞에서는 항상 각 잡고 있었다는 일화를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다. 말년에 은퇴하고 [[삽살개]]와 눈싸움을 했는데 개가 가만히 있자 "나도 갈 때가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1452년 [[세는나이]]로 90세라는 당시 사람으로서는 드문 [[장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했다.[* 의료 기술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전한 현재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80대 중반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황희는 현재 기준으로도 한국인의 평균수명보다 7년을 더 산 셈이다. '''공민왕 때''' 태어나 문종 때 죽었으니, 여말선초의 혼란상과 이를 극복하고 이어진 세종의 태평성대까지 모두 다 보고 죽었다.] * 당대로서는 왕조차도 50대를 넘기기 힘들었고,[* 왕들은 새벽 3~4시에 일어나 왕실 어른 문안부터 시작해서 조회, 서류 검토 및 결재, 경연과 같은 일정을 쉬지 않고 소화한 후 밤늦게 잠드는 스케줄을 1년 내내 반복해야 했다. 격무에 시달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고, 대체로 운동 부족이라 세종처럼 성인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아 장수한 경우가 의외로 드물다. [[사냥]]이나 여러 잡기를 통해 운동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쉽지 않았다. 46년 동안 재위한 [[숙종(조선)]]이나 52년 동안 재위한 [[영조]]는 예외적인 경우다. 그리고, 숙종조차도 13살에 재위했을 뿐. 예순을 못 넘겼다. [[영조]]의 경우에는 소식과 운동 등으로 건강을 챙겼으니 그나마 장수하는 것이 납득이 된다.] 서민들은 간혹 100살 넘게 장수한 경우가 실록에 기록되기도 했지만 [[평균 수명]]은 3~40대에 그쳤다.[* 영아사망률을 제외하면 조선의 평균 수명은 47세로, 영아사망까지 포함하면 20대로 폭락한다. 참고로 [[고려]]의 평균 수명은 42세였다.] *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황희보다 더 오래 산 사람들은 100세를 넘겼다는 [[이징옥]]의 아버지 이전생(李全生), [[이속(조선)|이속]]의 백부로 검교좌의정(檢校左議政)에 올라 좌의정(左議政)으로 치사(致仕)한 이귀령(李貴齡, 1345~1439)[* 이귀령은 조선의 정승 중 가장 장수했던 인물이다.], [[효령대군]](1396~1486), 이구원(李久源, 1579~1675), [[성혼]]의 손자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성직(成稷, 1586~1680),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홍수렴(洪受濂. 1642~1736), [[효종(조선)|효종]]의 서녀 [[숙녕옹주(효종)|숙녕옹주]]의 남편 박필성(朴弼成, 1652~1747) 등이 있다. 황희의 장남인 황치신(黃致身, 1397~1484)도 장수했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며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나중에 가장 출세한 셋째 아들 열성공(烈成公) [[황수신]]이 공신이 되자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작위가 추봉되었다.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100340000&pageNo=1_1_1_1|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