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희(조선) (문단 편집) === 정승이 되기까지 === 1363년([[공민왕]] 12년) [[개경|개성부]] 가조리(可助里)에서 자헌대부 [[황군서]]와 용궁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황군서]]를 비롯한 부계의 고향이 남원이라 남원 출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이호문(李好問)의 [[사초#s-1]]에 따르면 [[서얼|얼자]]라고 하는데, 적어도 정실 소생이 아니라는 것만은 평소에 본인이 말하고 다녔기 때문에 당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적서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물론 얼자 정도면 얘기가 약간 달랐을 수도 있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년) [[음서]]로 14살에 품계가 없는 녹사(錄事)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389년([[공양왕]] 1) [[과거 제도|문과]]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1390년(공양왕 2) 정9품 [[성균관]] 학록(學錄)이 되었다. 이후 [[조선]] [[태조(조선)|태조]]와 [[정종(조선)|정종]] 대에는 자신이 볼 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임금의 명령이라도 거부하는 완고함 때문에 여러 번 파직되어 관직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종(조선)|태종]]이 즉위하고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천거로 1401년(태종 1) [[도평의사사]] 경력, 1402년(태종 2) 대호군 겸 승추부 경력이 되더니 1405년(태종 5) 박석명의 후임으로 지신사가 되면서 관직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태종은 황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4년 동안 지신사직에 두어 크게 중용했다. 지신사는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시행을 감독 및 보고하던 대언(代言)의 으뜸으로, [[승정원#s-3|도승지]]의 전신이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이다. [[국왕]] 직속인 만큼 [[권력]]뿐만 아니라 업무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자리로 유명하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던 태종에게 이 정도로 중용받을 정도면 [[능력]]은 입증된 셈. 소위 코드 인사로 인해 일부 관료의 인망을 잃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후 이조, 호조, 예조, 형조, 병조, 공조판서직을 모두 역임했다. 다만 당시는 현대만큼 사회가 복잡하지 않아 한 부서가 담당하는 일의 폭이 훨씬 넓었다. 지금과 비슷하게 부처가 나누어진 것은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일이다. 도승지와 6조 판서와 영의정 모두 지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 행정각부 장관, [[국무총리]]까지 지냈다는 말이다. 이처럼 국정 전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 크게 신임을 받았다. 태종은 이런 말로 자신의 측근인 황희에 대한 신임을 표현했다고 한다. >此事予與卿獨知之, 若泄非卿卽予. >"이 일은 [[태종(조선)|나]]와 경만이 홀로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 >《[[문종실록]]》 [[문종(조선)|문종]] 2년([[1452년]]) 2월 8일 황희의 졸기(卒記) 그러나 폐세자 건이 나왔을 때는 적장자 계승 원칙을 고수하며 [[양녕대군]]을 두둔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파직된 뒤 [[유형|유배]]까지 갔다. 태종은 '민씨들에게 미움 산 것'을 만회하고자 [[세자]] 편을 들었다며 비난했고, 황희는 단순히 세자가 너무 가여워서 그랬다고 변명하였다. 태종은 황희가 자기의 신뢰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여 실망하고 황희를 [[시골]]로 내쫓았다.[* 이때 황희에게 "내가 죽으면 따라 죽을 사람은 그대라고 생각했거늘..." 이런 식으로 맹비난했다. 허나 훗날 세종에게 황희를 다시 불러들여 중용할 것을 권한 것을 보면 능력은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씨들에게 미움 산 것'은 [[민무구]], [[민무질]] 등의 옥사를 가리킨다. 당시 [[조정]]에서는 지신사 시절의 황희가 민씨 집안을 박살 낸 장본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극비 정치 사안을 함께 의논할 정도로 태종의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파주]]에 있는 교하(交河)로 유배를 갔다가, [[한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유배지가 지금의 [[전라도]] [[남원시|남원]]으로 변경되어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이것도 황희의 향관이 남원이었기 때문에 약간 배려한 것. 황희는 노모와 처자식을 데리고 남원에 가서 머물렀다. 이 시기 황희가 지은 광통루라는 누각이 현재의 [[광한루]]이다. 평소 황희를 아끼고 높이 평가한 태종이었기에, 태종이 [[세종(조선)|세종]]에게 [[양위]]하고 군권만 행사하는 [[상왕]]으로 물러난 후 1422년 세종에게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을 권유하면서 재출사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후 세종에게 중용되어 [[강원도]]의 기근을 해결하는 데 공을 세웠고, 1426년(세종 8) 우의정에 오르면서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1427년(세종 9) 좌의정이 되어 [[수상]]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1431년(세종 13) 원래 영의정부사였다가 늙어서 본직을 내려놓고 부원군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던 [[이직(조선)|이직]]이 죽자 영의정부사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