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희(조선) (문단 편집) == 기타 == * 한때 [[김종서(조선)|김종서]]를 자신의 뒤를 이을만한 차세대 인물로 인정했을 때 급한 성품을 고쳐준다는 이유로 일부러 김종서를 심하게 갈궜다는 일화도 있다. 하루는 북방에서 조정으로 복귀한 김종서가 황희가 들어왔음에도 모른 척 비뚤어진 자세로 있다가 "저놈 의자 다리가 한쪽 망가진 모양이니 고쳐줘라"라는 한마디에 바로 정좌했다는 이야기. 다른 이야기로 황희를 비롯한 [[정승]]들이 한창 정무 일을 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자 김종서가 [[음식]]상을 차려서 정승들에게 보냈다. 그러자 황희는 "관료들을 접대하는 일은 조정의 예빈시가 맡는 일인데 왜 멋대로 월권 행위를 하는가?"라며 김종서를 호되게 혼을 냈다는 야사이다. * [[임진왜란]] 직전 통신정사로 파견된 우송당 [[황윤길]]은 그의 5세손이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준비 중이라고 정확히 파악하고 강력하게 조정에 경고했으나 당파 싸움에 밀려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런데 은근 평이 나쁜데 <선조수정실록>에서 황윤길과 [[허성]]은 재물만 밝히거나 겁을 먹어 왜인들이 비루하게 여겼다고 기록되었기 때문.[* 황윤길의 당색은 [[서인]].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후 [[북인]]의 편향적인 시각이 담긴 <선조실록>에 반발해 [[반정]] 세력인 서인들이 편찬한 것이다. 황윤길은 같은 서인들한테도 비난을 받은 것이다.] * <[[춘향전]]>의 중요한 무대인 [[광한루원|광한루]]를 세운 인물이다. 1419년 황희가 [[양녕대군]] 옹호 문제로 파직되고 [[남원시|남원]]으로 유배를 왔을 때 지었다.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광한루는 1626년 남원부사 신감이 재건한 것. <춘향전>의 시기가 [[숙종(조선)|숙종]] 즉위 초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대가 되는 광한루는 신감이 재건한 광한루로 보는 것이 맞다. * 워낙 장수해서 그런지 일생 동안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태조(조선)|태조]], [[정종(조선)|정종]], [[태종(조선)|태종]], [[세종(조선)|세종]], [[문종(조선)|문종]] 등 무려 9명의 왕의 치세를 경험했다. [[파일:반구정.jpg]]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파주)|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황희 정승의 업적을 기리는 [[유적]]지로 유적지 안에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100120000&pageNo=1_1_1_1|반구정]](伴鷗亭)과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100290000&pageNo=1_1_1_1|황희선생영당지]], 방촌기념관 등이 있다.[* 방촌유적지라고도 한다.] 현대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 사람들에게는 [[임진강]] [[민물장어]] 식당촌으로 더 유명하지만 반구정 [[이름]]의 유래 자체가 황희 정승 유적지다. 1449년 황희가 정승에서 물러난 후 경기도 파주에 머물렀을 때 [[임진강]]변에 지어놓은 목조 [[정자]]. '임진강에 날아온 [[갈매기]]와 벗삼아 나누는 정자'라는 뜻으로 지어졌다. 황희가 말년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 정자로 그가 운명한 이후 유림들과 사림들이 황희를 추모하는 정자로 칭송을 받았으나 1950년 [[6.25 전쟁|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남침 및 임진강 도강 때 파괴되어 멸실되었다가 1967년 황희 [[후손]]들이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임진강과 [[장단군|장단]]을 바라보는 운치가 있는 곳이지만 [[지리]]적으로 북한 [[개성시|개성]] 지역과 근접해 있는 지역이라 임진강 주변에 철책선이 있고 [[대한민국 육군|육군]] 경계초소가 있어서 군사적인 긴장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대낮에만 풍경을 볼 수 있는 편으로 밤에는 아쉽게도 풍경을 직접 볼 수 없다. 이 때는 [[초소]] 초병들이 경계 목적으로 서게 되기 때문에 [[민간인]]들은 일몰 및 저녁 이후에는 반구정 출입이 금지된다. * 세종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재상]]의 위치에 있는 인물로 지금까지도 흔히 "황희 정승"이라고 불릴 만큼 정승이라는 말과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승]]의 대명사가 되었다.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낸[*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장 기간 영의정 재임이다. 덧붙여 가장 많이 임명된 인물은 [[숙종(조선)|숙종]] 때의 [[최석정]]으로 무려 9번이나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소론]]이었기에 사직을 반복.([[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대표였던 지천 [[최명길(조선)|최명길]]의 손자.)] 대기록 때문인지 야사에도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계란유골]]의 고사, "어느 소가 일 더 잘해요?" 얘기라든지, 무엇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네가 옳다. 너도 옳다. 부인 말도 옳소."[* 황희가 [[양비론]]을 펼치는 쿨찐의 모습이라며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실제 속 뜻 의미는 의미없는 논쟁에 참여하지 않고 관심조차 주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인터넷 키배에서도 자주 보이는 해결법이다 보니 [[반박시 니 말이 맞음]]단어의 유행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늦게 재평가 받고 있다.] 등의 이야기가 있다. * 그의 딸은 입을 속곳(속옷)이 한 벌뿐이었으니 딸을 [[결혼]]시킬 돈도 없었다. 헌데 하루는 세종과 신하들과 여러 백성들이 보는 자리에서 [[광대]]들이 신나게 줄타기를 하는데 어느 광대가 줄타기를 하면서 "어허, 이 줄타기 춤은 황 정승 속곳 춤이올쎄."라고 외치는 거 아닌가? 이 말을 들은 어느 대신이 "이놈, 감히 영상대감을 모욕하는 거냐? 죽고 싶은 게로구나!" 분노하였지만 그 광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줄타기를 하며 말을 계속했다. "보통들 황정승 나리의 하나뿐인 따님에게 속곳을 달랑 한 벌 남겨두고 살아가는 것을 청렴결백이라고 추앙하지만, 천한 것인 이 몸에게는 쓸데없는 짓거리로만 보일 뿐이옵니다. 혼례가 뭐 대충 치르는 겁니까? 어디 이 속곳춤을 따지실려면 그 황정승 속곳춤의 유래를 과연 옳다고 보실 수 있는지요. 그 따님의 삶은 생각도 하지 않으시는거 아니온지요.[* 한마디로 "속곳도 제대로 못 입고 결혼도 못하고 어렵게 어렵게 살고 있는 황정승네 따님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남 일이라고 뒷짐 지고 서서 청렴하네 뭐네 위선이나 떠는구나. 참 잘나셨다."]이래도 이 광대 놈의 춤과 말이 싫으시다면 사정없이 목을 베시지요."라고 말하면서 살판나게 춤을 추었고 그 대신도 주변 인물들도 뭐라고 반론하지 못하고, 황희를 쳐다봤다. 결국 그 눈길을 견디지 못한 황희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성당 만화위인전 1981년판에서는 바위라는 이름을 가진 광대가 춤을 추며 꽤 길게 이야기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황희가 "왜, 저 놈이 애꿎은 나를 물고 늘어지는 거냐?" 라고 화낸다. 바위라는 광대는 이 혼례를 이야기하며 "이 얼마나 눈물겹단 말이냐, 정작 청량리 청량리라고 황대감께 찬양받지만 정작 자기 딸내미 마음도 헤아리는 거 맞느냐? 얼씨구, 얼씨구 동네방네 모든 이들에게 이를 알리리오, 알리리라."라고 춤을 춘다.(여기에서는 황희를 위선자라고 더 비아냥거리는데 남들에게 칭송받으나 정작 댁은 딸 혼례를 그 모양으로 하면서 뭐? 적당히 청량리 궁상 떠슈! 라고 풍자한 것) 그 자리에 세종도 있어서 결국 황희는 줄행랑쳤고 세종이 황희를 불러와 혼례품을 국고로 지원한다.] 이 이야기는 야사일 가능성이 크다.[* 애시당초 비슷한 설화가 여기저기 보이는데 그게 황희한테도 옮겨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청탁 때문에 [[탄핵]]된 적이 1~2번이 아니었으니 사실 청백리라 하기는 힘든 인물이지만 야사에서는 왠지 청렴한 관리로 남았는데 실제 행적을 두고 보면 청백리로 언급되는 것은 죄다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 황희의 청백리 이야기와 관련되어 유명한 것이 [[계란유골]]의 고사인데 이것 역시 정식 사서가 아니라 조선 후기에 나온 『송남잡지』(松南雜識)에 실려있던 일화며 시기상의 차이와 실제 행적을 볼 때 이쪽 역시 빼도 박도 못하는 [[야사(역사)|야사]]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새서 방 안에 그릇을 놓아두고 [[우산]]을 쓰고 있었다는 일화 역시 거짓말. 여느 벼슬아치들과 다를 바 없이 크고 아름다운 기왓집이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수 차례 나왔던 황희의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은 야사에서도 잘 나타나며 무려 [[노비]]의 아이가 한 나라의 정승인 자신의 [[수염]]을 잡아 당겨도 혼내지 않고 그저 허허 웃어 "허허 정승"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강강약약]]. * 다른 야사로 노비를 출세시킨 이야기가 있다. 평소 자신이 거느리던 노비가 매우 현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자, 황희는 밤에 몰래 부른 다음 노비 문서를 건네주고 "글공부를 해서 성공하라"며 떠나보냈다. 이후 세월이 흘러 황희가 [[과거 제도|과거]] 시험관을 맡았는데 그 시험에서 급제한 인물 중 1명이 그 노비였다는 야사. * [[궁녀]]와 총각이 남 모르게 [[사랑]]을 하다가 발각되면서 처녀는 고문을 당했고 총각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총각이 황희 정승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다음 날 그는 [[궁]]에 가서 [[임금]]에게 계속 웃고 있었다. 이에 왕이 웃는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궐문을 나설 때 숫진드기와 암파리가 싸우고 있었는데 숫진드기가 "함께 살자"고 했더니 암파리는 "요새 시골 총각이 처녀와 함께 살다가 쫓겨난 일도 모르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왕은 황희의 뜻을 알아챈 다음 "궁녀를 풀어주고 총각도 더 이상 찾지 말라"고 명했으며 그 뒤 이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야사가 있다. * 황희가 [[청년]]일 때 어느 [[농부]]가 [[소]] 두 마리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황희는 "이 두 소 중에 어느 소가 일을 잘합니까?"라고 농부에게 물었더니 그 농부는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와 "누런 소가 검정 소보다 일을 잘한답니다"라고 귓속말로 대답했다. 황희는 황당해하면서 "그냥 있는 곳에서 말하지. 왜 굳이 귓속말로 대답합니까?"라고 물어보았더니 농부는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일 못한다는 험담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일로 황희는 앞으로 말조심을 하게 됐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교과서에도 삽입돼있어 대부분들의 일반인은 이 일화 하나로 황희를 기억하기에 위에 적혀진 큰 흠결들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강직하다고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 민담에 따르면 황희는 눈빛이 매서워서 심약한 사람이나 어린아이 그리고 동물들이 황희와 눈이 마주치면 기가 팍 죽거나 심지어 숨이 멎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말년에 황희가 [[삽살개]]와 눈싸움을 했는데, 삽살개가 빤히 눈을 뜬채 황희와 마주보자 황희가 '나도 갈 때가 됐구나.'라고 하며 노년의 자신의 모습을 한탄했다고 한다. * 야사에는 당시 장안의 유명한 점쟁이인 홍계관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미래]]를 점쳐보니 아무리 점을 쳐봐도 [[쥐]] 때문에 개죽음을 당할 [[운명]]인지라 살아남을 방도를 찾던 중 우연히 황희 정승의 아들 3형제의 사주를 봐주게 되었다. 장남과 차남은 별 볼 일이 없었지만 막내인 [[황수신]]이 훗날 정승 반열에 오른다는 점괘를 본 홍계관은 황수신에게 "자신을 살려달라" 부탁했고 황수신은 못 미더웠지만 "일단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은 했다. 세월이 흘러 [[세조(조선)|세조]] 대에 이르러 홍계관의 점이 용하다는 [[소문]]이 대궐까지 알려져 세조가 홍계관을 불러 상자를 하나 내밀며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질문하자 홍계관은 "쥐 세 마리가 들어있다"고 대답했지만 상자를 열어보니 쥐는 한 마리만 들어 있었다. 이를 본 세조는 홍계관을 혹세무민하는 자라 하여 "끌어내 죽이라" 명령하고, 홍계관을 심문하기 위해 한 관리가 들어오는데 그가 바로 [[형조판서]]가 된 황수신이었다. 황수신과 홍계관은 서로 알아보고, 홍계관은 그 문제의 쥐를 "다시 1번 조사해 달라" 부탁한다. 이에 황수신이 세조의 허락을 얻어 그 쥐를 살펴보니 유난히 통통했길래 배를 갈랐더니 새끼 쥐 두 마리가 나왔다. 홍계관의 점술에 놀란 세조는 즉시 홍계관을 풀어주었고 그렇게 홍계관은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판본에 따라서 쥐가 5마리이기도 하다. [[분류:1363년 출생]][[분류:1452년 사망]][[분류:개성시 출신 인물]][[분류:장수 황씨]][[분류:고려의 인물]][[분류:조선의 문관]][[분류:서출]][[분류:영의정]][[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분류:이조판서]][[분류:호조판서]][[분류:예조판서]][[분류:병조판서]][[분류:형조판서]][[분류:공조판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