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포군관학교 (문단 편집) == 개요 == [[1924년]] [[중화민국]] [[중국국민당]] 광저우 정부가 [[광저우]] 황푸에 세웠던 사관학교다. 정식명칭은 "국민당 육군군관학교". 이 학교는 이후 [[대만 군관학교]]로 개편되지만,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옮겨간 [[1927년]] 이전까지 황푸에 있었고 [[우한]]에 [[분교]]가 있었는데, 분교 재학생들도 황포군관 출신으로 간주한다. [[1930년]] 중앙군관학교로 이름을 개칭할 때까지 7기까지를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 대만자료를 보면 난징에 옮겨온 6기나 7기 이후에도 황포X기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황포가 미 육사의 또다른 명칭인 [[미국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처럼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의 별칭이 된 것.] 이 [[학교]]는 황푸의 (영어식) [[광동어]] 표기를 따서 [[영어권]]에서는 Whampoa Military Academy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장제스의 북벌]]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공헌했으며[* 중국의 다른 군벌들은 [[정규군]]이라고는 하지만 체계적으로 [[군사학]] 등을 교육한 [[장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일본 육사]] 등에 유학해서 신식 교육을 받은 극소수 장교들은 소수의 정예부대에만 배치되었다. 군벌 지휘관들 상당수는 최대 군벌 세력이던 [[장작림]]이 [[마적]] 두목 출신이었듯 인적으로 질이 높지 않았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육사]], [[일본해군병학교]]([[사관학교]]에 해당)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유일한 체계적인 장교 양성기관이었다. [[중국]] 이외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한국]], [[북한]]의 초창기 인재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서 배출된 지휘관들은 후에 국공 양당의 핵심 [[지휘관]]이 된다. 장제스 교장 재임시절의 황포군교 출신은 [[국부군]]에서 "황포계"라고 불리며 장제스 직계로 간주되었다. 대략 [[국부천대]] 이후 [[1960년대]]까지 이들이 [[대만군]]([[육군]])의 수뇌를 이루었다.[* 대만군의 [[국방참모총장]]은 육해공 돌아가면서 하는데 고괴원(1967-1970) 참모총장(4기, 일급상장)을 마지막으로 황포계는 역사에서 퇴장했다. 이후 [[참모총장]]들은 모두 난징이나 대만 시절 재학생들.] 공산당의 초기 무장봉기에도 상당한 활약이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정치주임 재직시에 포섭하여 공산당에 가입시킨 황포군교 생도들이 상당수 있었다. 초창기 공산당의 무력은 이들이 다수였으나 [[난창 폭동]]-[[광저우 폭동]]-[[초공작전]]-[[대장정]]-[[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전사했다.[* 다만 2차 국공내전(1946-49) 시절에는 공산당측 황포군교 출신들은 대부분 여단장급 이상으로 승진해 있었기 때문에 유력 인사들 중에 전사자는 거의 없다.] 특히 1927년의 공산당의 모험주의적인 봉기(난창, 광저우 폭동)는 황포출신이 주력이었는데, 이때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에 맞서다가 대부분 전사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을 때 인민해방군 고위직에서 황포출신들이 다수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5년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원수 10명중 2명, 대장 10명중 3명을 배출했다. 상장도 많이 배출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625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송시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