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철 (문단 편집) === 인기스타가 되다 === 아무튼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상술했듯이 조선연극사는 해산되고 새로 개관한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청춘좌로 흡수되었는데, 이제 막 주연을 맡기 시작하여 이름을 얻기 시작한 황철로서는 이미 [[일본]]에까지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유명 배우였던 [[심영(배우)|심영]]은 넘어야할 산이었고,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은 동양극장의 청춘좌에서 공연한 여러 작품들에서 주역을 맡으며 선의의 연기 경쟁을 펼쳤는데, [[춘향전|<춘향전>]]에서는 황철이 이몽룡, 심영이 방자 역을 맡았고, '단종애사'[* [[이광수(소설가)]]의 소설을 최독견이 각색]에서는 황철이 [[문종(조선)|문종]], 심영이 [[성삼문]] 역을 맡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심영이 황철에 비해 그 인기나 위상이 우위에 있는 편이었지만, 이후 이 구도가 결정적으로 뒤집히게 되는 작품이 바로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제목으로도 유명한 임선규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다.[* '[[홍도야 우지마라]]'라는 노래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노래다.] 동양극장에서 야심차게 준비하고 공연했던 '단종애사'가 [[수양대군]]이 왕의 자리를 찬탈하고 조카인 [[단종(조선)|단종]]을 죽인다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 내용이 조상을 모욕하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이왕직[*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을 이왕가로 격하시켰고, 이왕가의 업무를 관장하던 곳이 이왕직이다.]이 공연 중단을 요청해 와 결국 '단종애사'가 조기종영되자, 땜빵으로 선택된 작품이 바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인데, 임선규가 이 작품을 처음 탈고하였을 때 최초 원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청춘좌의 연출가인 박진은 이 작품을 읽어 보고 "내가 싫어하는 신파극의 내용이 이 안에 전부 다 들어있다."며 이 작품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동양극장의 사장인 홍순언은 이 작품을 마음에 들어했고,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지만, 박진은 "이런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이야기를 누가 보겠냐."며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걸 끝까지 반대했다. 하지만 홍순언은 박진의 말에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의 제목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바꿨고, 박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단종애사'의 조기 종영 이후 급하게 무대에 올릴 마땅한 다른 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박진도 더는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걸 마냥 반대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인데 그렇게 급하게 무대에 올려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된 것이다. 홍순언은 "[[통속극|어쨌든 연극해서 돈을 벌려면 덮어놓고 눈물을 팔아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생각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오빠인 철수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여주인공 홍도가 오빠의 친구 광호를 만나 결혼했지만, 기생이었다는 이유로 시가(媤家)의 무시와 괄시를 받다가 결국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남편의 새로운 약혼녀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잡혀가서 재판을 받는데, 오빠가 담당 검사다라는[* 판본에 따라서 오빠가 검사가 아니라 순사로 나오고, 마지막에 남편의 새로운 약혼녀를 살해한 홍도가 오빠의 손에 잡혀가면서 끝나기도 한다.] 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막장 신파극[* 오늘날의 [[막장 드라마]]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 임선규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를 황철과 차홍녀를 생각하며 썼기 때문에, 차홍녀가 연기한 여주인공의 이름은 홍도가 되었고, 황철이 연기한 여주인공의 오빠의 이름은 철수가 된 것이다.]은 그야말로 온 경성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으며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공연을 보러 동양극장 앞으로 몰려왔으며, 서대문 경찰서에서 동원된 순사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관객을 두들겨패기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이후 경성에서 수십 번의 재공연이 있었지만 만원관객이 아닌 적이 없었고, 지방공연도 연일 대 성공이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그야말로 동양극장의 마르지 않는 돈줄이었고[* 심지어 동양극장이 망하고 나서도, 해방 후에도 계속 리바이벌 해서 공연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홍도야 울지 마라' 라는 제목은 해방 후의 재공연에서 바꾼 제목이다.], 이때까지 적자 운영을 하며 돈에 쪼들리던 동양극장은 극장 개관 이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권번의 [[기생]]들에게 특히 더욱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어느 정도였냐 하면 기생들이 이 연극을 보러 동양극장에 가느라 요정이 장사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반면 동양극장에는 기생들을 구경하기 위해 장안의 한량들이 몰려 들었다고 한다. 극장 안은 기생들이 피는 [[담배]] 연기와[* 요새야 뭐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극장이나 버스, 지하철 안에서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들이 흘리는 눈물로 가득 찼고, 여주인공 홍도의 오빠 철수를 연기한 황철과 여주인공 홍도를 연기한 차홍녀는 기생들의 아이돌이 되었는데, 공연이 끝나면 동양극장 앞에는 기생들이 황철을 모시기 위해 대기시킨 [[인력거]]들이 줄을 이어 서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은 황철과 차홍녀가 그대로 출연한 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반대되는 내용, 그러니까 [[기생]]이 악녀로 나오는 연극을 올린 적도 있었는데, 기생들의 항의로 연극이 중단되는 사태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기생들은 동양극장의 단골 VIP 손님이자 돈줄이었던 것이다.] 어쨌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인해 황철과 [[심영(배우)|심영]]의 인기와 위상은 180도 완전히 뒤집혔고[* 더군다나 [[심영(배우)|심영]]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홍도의 남편 광호, 그러니까 악역을 연기하였다.], 이 때 부터 황철의 전성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하는데, 그럼에도 [[흑역사]]가 하나 있었으니,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기록적인 흥행과 동시에 영화화 까지 되었고, 황철과 차홍녀도 그대로 영화에 출연해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1939년]] [[3월 17일]] 동양극장과 부민관에서 동시 개봉되었지만, 흥행에도 실패하였고, 1939년 제작된 영화들 중 가장 최악의 실패작이라는 불명예도 얻는다. 이유는 기술상의 문제인데, 녹음이 잘못 되어 배우들이 하는 대사가 관객들에게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즈음 황철은 동양극장의 또 다른 전속극단인 호화선의 여배우 이정순과 결혼하였고, 부업으로 여관을 운영하기도 하였는데, 1939년 동양극장의 사장 홍순언이 안타깝게도 급사하고 만다. 배구자는 동양극장의 경영을 최독견에게 일임하였지만, 홍순언이 사망한지 몇 달이 채 안 되어 최독견은 방만한 경영으로 동양극장을 말아먹고 [[중국]] [[상하이]]로 도망가고 만다.[* KBS 드라마 '동양극장'에서는 [[김갑수]]가 최독견을 연기하였고, 최독견이 동양극장을 말아 먹고 [[상하이]]로 도주한 뒤 맨 마지막회인 28회 즉 광복 이후 북으로 갔다 다시 월남해 신문사 주필로 가게되었다 말하며 연극에 완전히 손떼는데 실제 최독견은 [[1970년]]에 죽었다. 동양극장을 말아먹은 후에는 다시 언론인으로 돌아갔었는데, 그마저도 1959년 최독견이 발행인으로 있던 월간지 '야화'에서 조영암이라는 놈이 [[전라도]] 사람들을 모욕하는 글을 게재했다가 조영암이라는 놈은 명예훼손으로 구속되었고, 최독견 본인도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은 최독견은 언론계나 문단계에서 사실상 완전히 매장되었다.] 배구자는 동양극장을 채권단에 넘겨버렸고[* 남편의 초상이 끝나기도 채 전에 이미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배구자는 재혼과 함께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하였으며, 배구자가극단도 해체되었다. 후에 배구자는 1950년 [[일본계 미국인]]인 3번째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갔으며, 98세로 장수하였으며 2003년 사망하는 순간까지 평생 그 곳에서 살았다.], "극단은 샀을지 모르지만 사람까지 산 것은 아니다."라는 박진의 말에 동조한 청춘좌의 소속 배우들은 배구자의 이런 조처에 반발하여 청춘좌를 집단 탈퇴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청춘좌의 소속 배우들은 극단 아랑을 조직하여 모이게 되는데, 이 때 최고의 스타가 된 황철이 대표가 되어 극단을 이끌게 된다. 아랑은 주로 동대문 근처에 있던 제일극장을 사용하였는데, 서대문 근처에 위치했던 동양극장과 제일극장은 자연히 라이벌이 된다. 어찌 되었건 황철과 아랑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잘 나가게 되는데, 1940년 4월 임선규작 '[[김옥균]]'은 아랑의 최고 성공작이자 흥행작이라 할 수 있는데, 임선규가 여러 해 동안 다듬은 '김옥균'은 무대의상, 장치비용만 8,000원이 든 당시로서는 엄청난 스케일이었고, 심지어는 경비행기를 사용하여 경성 시내에 선전지를 뿌렸다고 한다. 참고로 [[이광수(소설가)|이광수]]는 '김옥균'을 관람하고자 했으나 끝내 표를 구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어찌저찌 하여 관객석이 아닌 분장실에서 '김옥균'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연극을 관람 하였고, 나중에 공연이 끝나고 난 뒤에 보니, 어찌나 울어댔던지 눈이 퉁퉁 부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건 아랑이 최고의 극단으로 자리 매김하고, 황철 본인이 여전히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이 때 부터 본격적으로 흑역사가 시작되게 되는데, 우선은 '''불륜''', 황철은 당대의 최고 인기 스타였고 그의 주변에는 여자가 항상 끊이질 않았다. 거기다가 황철 본인이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자신의 바람기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했는데, 문제는 불륜의 상대가 극단 아랑의 후배 여배우 문정복[* 배우 문정숙의 언니이자 배우 [[양택조]]의 어머니.]이었던 것이다. 문정복인게 왜 문제가 되냐면은 문정복은 황철의 부인 이정순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문정복과 이정순 두 사람 모두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호화선 출신이다.], 더군다나 가정이 있는 유부녀였기 때문이다. 문정복의 남편은 배우 양백명이었는데, 뭐 기생들과의 관계를 가진 정도는 황철이 평소에 여자 관계가 난잡했고, 또 당시 관례상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선배 배우의 부인이자 자기 부인의 친구와의 불륜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이 스캔들이 알려지자 황철은 선배의 부인을 뺐은 인간으로 엄청 까이게되지만[* 황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 '동양극장'에서는 [[김규철(배우)|김규철]]이 양백명을 [[최정윤(배우)|최정윤]]이 문정복을 맡았는데, 문제는 주인공 미화로 불륜의 피해자인 양백명을 나쁜 놈으로 표현하였다. 드라마의 제작진은 [[고소미]]를 피하기 위해 양백명은 양천명으로 문정복은 문정현으로 이름을 바꿔 등장시켰다.] 그래도 그의 인기에는 별로 타격이 가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당시에 인터넷 같은게 있었을리 없을테니, 그의 이러한 악행이 대중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