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철 (문단 편집) === 홍순언과 배구자의 인연 === 동양극장의 설립자인 홍순언은 열차 식당의 종업원으로 시작하여 호텔 지배인과 극장의 사장으로 입지적인 성공을 거둔 인물인데, 동양극장을 개관했을때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홍순언의 부인 배구자는 [[배정자]]의 조카로[* 조카가 아니라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배구자가 [[이토 히로부미]]와 배정자 사이의 사생아 라는 소문은 꾸준히 돌던 소문인데, 배구자의 동생인 배한라는 "언니가 이토 히로부미와 고모 배정자 사이의 딸이었던 까닭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고로 [[1905년]]생인 배구자는 [[2003년]]까지 장수하였는데, 나중에는 ~~정신이 훼까닥 돌았는지~~ 자신이 [[메이지 천황]]의 10번째 딸이고, 할머니는 [[명성황후|민자영]]이고, 자신의 어머니는 조선의 공주라는 미친 소리를 하고 다녔다.] 11세 때 텐카츠 예술단[* 1900년, 쇼코쿠사이 텐카츠에 의해 창단된 텐카츠 예술단은 기술, 마술, 곡예, 무용, 연극, 가극등 여러 분야의 공연을 하였으며, 단장인 쇼코쿠사이 텐카츠는 다양한 레파토리의 공연을 개발하여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과 [[영국]] 등 [[유럽]]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40여 명의 단원들은 모두 춤과 노래, 연기, 곡예 등을 할 수 있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내에선 [[1913년]]에 처음 내한공연을 한 이래, 역시나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에 입단하여 쇼코쿠사이 텐카츠의 양녀가 되어 무용을 배운 이래 텐카츠예술단의 최고 스타가 되었는데, [[1926년]] [[6월 4일]] 공연을 마치고 돌연 텐카츠예술단에서 탈출하여 잠적하는데[* 참고로 이때까지 배구자는 [[한국어|조선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이때 배구자의 탈출을 도와준 이가 당시 배구자가 머물고 있던 평양철도호텔의 지배인 홍순언이었고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드라마 '동양극장'에서는 [[김병세]]가 홍순언을, [[박지영(1969)|박지영]]이 배구자를 연기하였다.] 배구자가 어째서 텐카츠예술단에서 탈출하였고, 탈퇴하게 되었는지는 그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텐카츠예술단의 단장이자 양모였던 쇼코쿠사이 텐카츠의 의붓아들과 사랑에 빠지게 돼서 그 처지가 곤란해 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긴 하지만 정설은 아니다. 참고로 배구자의 텐카츠예술단 무단 이탈은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던 일인데, 1921년 6월 배구자의 탈주를 보도한 매일신보의 신문기사는 배구자가 배정자의 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가 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텐카츠예술단에서는 배구자의 탈주를 배정자와 배구자의 부모의 음모로 인한 것으로 몰아 붙이면서, 그 이전에 일본에서 있었던 탈주 사건도 배구자의 부모가 텐카츠예술단에 돈을 요구하였다가 거절 당하자 배구자를 탈주시켰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매일신보에서 보도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텐카츠예술단을 탈퇴한 배구자는 은인인 양어머니를 배신하고 도망친 [[배은망덕]]한 여자로 몰려 위기를 맞이하지만, 1929년 6월에 국내 최초[* 배구자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최승희]]가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연건 그보다 몇 달 뒤의 일이다.]로 배구자무용연구소[* 여담이지만 배구자와 최승희를 비교하자면 배구자가 텐카츠예술단에서 대중적인 춤을 배운 반면, 최승희는 일본 무용계의 거두인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서 정통 서양 무용을 배웠고, 배구자의 무용이 흥행을 위주로한 대중적인 것이라면 최승희의 무용은 흥행이나 대중과는 상관 없이 예술적인 품립을 목표로 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최독견의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사실 학벌에 있어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배구자는 [[숙명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최승희]]와 비교가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용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도 최승희에게 우호적인 분위기였던 지라 점차 무용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였다고 한다.]를 개소하였고, 텐카츠예술단의 방식으로 소녀 단원들을 모집하여 맹훈련에 들어갔고, 곧 배구자무용연구소는 배구자예술연구소, 배구자소녀가극단 등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본격적인 공연에 나선다. 홍순언은 그런 배구자의 매니저 역할을 하였고 일본의 여러 흥행사들과 손을 잡고 배구자소녀가극단의 일본 순회공연에 들어갔는데, 그 일본 순회공연에서의 흥행으로 수익이 제법 나면서 이에 자신감을 얻은 홍순언은 마침 극장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지라, 와케지마 후지로라는 [[야쿠자]] 흥행사와 손을 잡고, 그의 자금지원을 받아[* 홍순언이 자본금으로 가져온 돈은 4천 원 남짓한 푼돈이었지만, 와케지마 후지로가 은행의 지원을 받아 약 20만 원 정도의 자금을 끌어왔다고 한다. 이 때 배구자의 로비가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있지만 확증 되지는 않았다.] 1935년 11월 국내 최초의 연극 전용 국장 동양극장을 개관하게 된다. 황철을 설명하는 항목에서 이야기가 잠시 딴 길로 빠졌는데, 황철을 설명함에 있어서 동양극장을 빼놓을 수 없고, 또 동양극장을 얘기함에 있어서 홍순언과 배구자 부부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개관한 동양극장은 총 3개의 전속극단을 두고 있었는데, 청춘좌와 사극을 전담적으로 공연하는 동극좌 그리고 희극전담의 희극좌가 있었는데, 동극좌와 희극좌는 후에 호화선으로 통합된다. 동양극장에는 당대의 명망 있는 작가, 연출가, 배우들이 모두 모였는데, 우선 홍순언의 먼 친척[* 최독견이 재혼한 부인의 7촌 조카가 홍순언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남인 관계다. 그래도 그 인연으로 홍순언은 배구자와의 결혼에서 부터 동양극장의 개관 등 자신의 인생의 많은 중대사들을 최독견과 의논했다고 한다.]인 소설가, 극작가 최독견이 지배인으로, 극작가 겸 연출가인 박진이 부책임자이자 청춘좌 전속 연출가로 실무를 책임지고, 최독견을 필두로 이서구, [[송영(1903)|송영]], 임선규, 박영호 등의 전속 작가진에, 홍해성과 박진 두 당대 최고의 연극 연출가가 소속되어 있었고, 전속 극단인 청춘좌에도 황철, [[심영(배우)|심영]], 차홍녀, 서월영, 김선영, 김선초, 지최순, 지경순, 지계순, 지두한 등의 당대의 유명 배우들이 모여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