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산벌(영화) (문단 편집) === 관객과 학계의 반응 === 역사에 대한 해석에 엄격하고, 그에 따라 '''영웅서사에서 벗어난 역사극'''의 시도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에서 이런 "영웅 없는 역사극"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영화 개봉 이후 영화평은 "감독이 역사를 단순한 코미디로 만들었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403100034|#]]는 의견과 "훌륭한 역사극이다."란 의견으로 크게 양분되었다. 역사학계의 입장은 후자에 가까웠다. 사실 역사라는 학문이 제일 좋아하는 게 사서를 액면 그대로 믿기보다는 거꾸로 보고 비틀어 보고 뒤집어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근거 없이 떠들어대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재해석하라는 건데, 이 영화는 여기에 훌륭하게 부합한다.[* 같은 맥락에서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대장금]]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좋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도전보다 몇 줄 없는 기록을 근거로 미시사적 측면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대장금 쪽이 현대 역사학의 흐름에 더 맞다.] [[황산벌 전투]]에서 전해지는 건 '계백이 처자식을 죽이고 결사대 5천을 이끌어 김유신의 5만 대군과 맞섰고, 4차례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에 화랑들이 자살 돌격으로 신라군의 독기를 올려 결국 신라가 승리했다' 정도밖에 없으니, 어떻게 싸웠는지, 계백의 최후가 어땠는지, 신라와 백제의 언어가 어떻게 달랐는지 등은 해석과 상상의 범위인 것이다. 굳이 고증을 따지자면 김인문이 친당파처럼 나오는 등 몇 가지 지적할 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가 개봉되고 십수 년 뒤와 달리, 이 영화가 개봉되었던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백제의 멸망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백제, 신라와 관련해서 일반 대중이 가지고 있던 인식은 그저 '의자왕이 삼천궁녀 끼고 술이나 퍼 마시다가 나라를 말아먹었다더라', '신라는 당나라에 영혼까지 팔아서 동족을 핍박한 민족 반역자 집단이더라' 정도였다. 그러나 극중에선 의자왕 이야기, 특히 백제 멸망의 원인을 두고 하는 이야기라면 [[삼국사기]] 등에 묘사된 의자왕의 타락 이야기를 근거로 으레 나올 법도 한 궁녀라고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으며, 그 대신 백제 지배층의 내부 분열과 전술적 오판 등을 묘사한다. "그 나라가 우덜 나란가? 느들 [[부여씨]] 나라제.", "3년 전 왕이 왕자들 41명을 죄다 좌평에 앉혀 놓은 뒤로는 우덜 나라는 없어져부렀제![* 삼국사기에도 나온 실제 기록이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왕자 41명'은, 원문을 따르자면 '서자 41명'은 실제 의자왕의 친자식들이라기 보다는 종친이나 왕실의 친위세력들을 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편인데, 의자왕이 "우리는 모두 가족이다"는 인식을 심어줬을 것으로 추정한다.]"란 백제 귀족들의 대사 등을 통해서는 백제 왕실과 귀족 집단의 분열과 반목 양상을 입체적으로 묘사해 주고, 나당 연합군의 진로를 두고 고구려로 갈지 백제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백제로 온다는 소식에 대경실색해서는 패닉 상태에 빠지는 백제 지배층의 모습 또한 묘사했다. 백제 지도부가 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쳐들어오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실제에 가깝다. 일단 한반도 서쪽 연안을 지나 중국으로 가는 연안 항로를 대체하는, [[황해]]를 직접 가로지르는 직항 항로는 삼국시대 말기에야 활용되기 시작하는데, 그 새로운 항로로 13만 대군이 날아오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하기 어렵다. 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 백제의 충신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는 [[성충]]의 상소문인데, 그걸 읽어보면 "어라하, 이제 술 그만 마시고 여자들이랑 그만 노세요!" 라는 식의 언급은 전혀 없으며, "어라하! 당나라와 신라가 분명히 쳐들어옵니다! 그러니 대비를 꼭 하시고, 특히 이러저러하게 준비하세요!"라는 것이 골자다. 또한, 신라와 백제를 두고 같은 민족 어쩌고 하는 일반 대중의 [[민족주의]]적인 관점은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려 1세기에 걸쳐서 이어진 지긋지긋한 피의 원한 관계뿐이다. '''"의자, 네놈이 왕 되고 지난 20년 동안 우리 신라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데이!"''' 라는 김춘추의 노기 어린 대사라든가, '''"느그 신라 씨벌놈들, [[관산성 전투|554년 옥천 땅]]에서 우리 고조 할아버지 [[성왕(백제)|성왕]]을 죽여서 어따 묻었어? 지난 100년 동안 느그 조상이랑 우리 조상이랑 전쟁하면서 있었던 일들 한 번 씨부려 볼까?"''' 라는 의자왕의 욕설섞인 대사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나당 연합군 내부 사정을 두고도 객관적이고 적절한 묘사가 이어진다. 신라 왕인 김춘추를 관등서열의 말단에 놓고 당나라 사람들을 그 위에 놓으면서, 신라군을 당군의 지휘 하에 두어 당나라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실히 하려는 당나라의 모습과, 그걸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배 돌려 그냥 갈까?"하고 묻는 당군의 질문 앞에서는 뭐 씹은 표정만 지어 보이면서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따를 뿐인 신라군의 처지를 잘 묘사했다. 그리고 그렇게 신라가 당나라에 길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땐 당나라 대장 [[소정방]]에게 칼을 뽑아 들며''' "느그 당나라 개새끼들, 내 언젠가는 이 땅에서 싸그리 쓸어버릴끼다!" ''' 라고 외치는 신라 대장군 김유신의 대사로 신라도 마냥 끌려다니기만 했던 게 아니며, [[약소국]]임에도 최소한의 자존심만큼은 분명히 지키고자 했다는 객관적인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실제로 668년 고구려 평양성 함락이후 불과 2년 뒤에 670년 나당연합은 깨지고 [[나당전쟁]]이 시작된다. 이유는 당이 여전히 백제땅과 대동강 이남에 당군을 주둔시키고 한반도 자체를 복속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신라 역시도 당이 이렇게 나올 거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 나당전쟁이다. 670년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2만의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공격하며 시작된 전쟁은 7년간 이어지고 그 막바지 [[매소성 전투]], [[기벌포 전투]]에서 대패한 당나라는 때마침 일어난 [[토번]]의 발호로 여러전선을 유지하기 힘들어 결국 물러난다. 물론 병력은 물렸지만 여전히 백제와 고구려 왕족들을 내세워 한반도 복속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전쟁 후 신라와는 완전히 적국으로 돌아선다. 이 관계는 성덕왕 시절까지 이어지고 이때쯤 당은 [[측천무후]] 시대를 거치며 [[발해|여러]] [[토번|외세]][[거란|와의]] [[돌궐|전쟁]]으로 한반도에 신경을 쓰기 어려워짐에 따라 결국 신라의 영토를 인정해주고 사실상 손을 털었다. 성덕왕 시절 다시 국교를 회복한 신라와 당의 관계는 당의 멸망시까지 이어진다. 비판 중에서는 이 영화가 [[애국심]]을 훼손하는 풍자와 비틀기라며 이준익 감독이 좌빨이라는 등 아니꼽게 보는 극우보수 쪽의 시각도 있다. 즉 '관창과 계백의 장렬한 애국심'을 조롱하며 폄하하고 '국가허무주의'를 부르짖는 영화라는 것. 극우 논객 [[조갑제]]도 이런 시각으로 [[월간조선]]과 [[조갑제닷컴]]을 통해 악평을 남겼다.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83&C_CC=AZ|조갑제닷컴의 글]],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3114§ion=sc3§ion2=|그에 대한 반박을 담은 대자보]], [[https://m.blog.naver.com/pykal/140003019701|누가 관창을 아름답다 캤노?]]. 하지만 관객들에겐 대체적으로 그럭저럭 잘 만든 [[코미디|코미디 영화]]로 받아들여졌고, 황산벌은 한국 코미디 영화 역사에 길이남을 흥행에 성공하며 [[대박]]을 거두었다. 이 흥행으로 [[키드캅]] 같은 [[나홀로 집에]]의 아류작을 만든다든가 [[성스러운 피]] 같은 영화를 수입해왔다가 큰 손해를 본다든가[* 그나마 황산벌의 성공으로 이때 진 빚을 겨우(제작한 흥행작 [[달마야 놀자]] 흥행도 이 빚을 갚는 데 썼다고 한다.) 갚았고, [[왕의 남자]]의 흥행으로 비로소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한다.] 하며 [[듣보잡]] 감독으로 전전하던 [[이준익]] 감독의 명성을 크게 알린 영화다. 참고로,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로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제작자로서 참여한 [[달마야 놀자]]가 대박을 거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