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규봉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시절 전성기의 주역으로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대통령배]], 쌍용기(이후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화랑대기]]), 우수고교 초청경기에서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의 우승을 이끈 에이스였다.[*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고]] 동기로 [[이선희(야구)|이선희]]가 있었지만, [[이선희(야구)|이선희]]가 두각을 드러낸 건 [[한국실업야구]]에서였다.] [[경북고등학교|경북고]] 졸업 후 [[고려대학교|고려대]]에 진학했는데, 고려대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불과 20세에 선수 생활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197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 때 대표팀이 묵고 있었던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미리 대피한 다른 선수들과 달리 미처 피하지 못한 황규봉은 결국 불길을 못이기고 '''3층에서 그대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허리 부상, 늑막염에 [[고소공포증]], 협심증, 극도의 정신불안 등이 발병하며 1년 반 동안 투병 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유급]] 경력이 있다.] 다행히 [[고려대학교]] 4학년 때인 1976년 봄, 대통령기 감투상을 수상하고 그 해 말에는 국가대표로 복귀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파일:external/www.koreadaily.com/180517731.jpg|width=300]] 고려대 졸업 후 1976년에 실업 야구 팀인 [[한국화장품 야구단|한국화장품]]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입단 동기로 [[김재박]], [[정구왕]] 등이 있다.] 입단 첫 해인 1977년 중순까지만 20승 이상을 올리며 팀의 에이스는 물론이고, 국내 최고의 투수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그 해 팀이 [[일본]] 원정을 가던 중 비행기 안에서 [[고소공포증]]이 재발하여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당초 생긴 고소공포증 보다 상태가 악화되어 고층에 위치한 입원실에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수 개월을 집에서 요양하며 증세가 조금 나아진 후에야 병원에 입원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79년 실업 야구에서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르며, 한국화장품의 에이스로 다시 재기한다. 1980년에는 세번째로 성인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되며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고 그 해 3월 27일에 열렸던 [[MBC 청룡]]과의 개막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최초의 선발투수'''였던 셈. 이 때 그의 나이가 29세로 당시에는 노장이라는 얘기를 들을 무렵이었다. 프로 첫 해에 다승 공동 2위[* 7선발승을 기록하여 [[권영호(야구선수)|권영호]], [[이선희(야구)|이선희]]가 11선발승으로 팀내 최다 선발승 공동 1위, [[성낙수]]가 8선발승으로 팀내 최다 선발승 3위를 기록해 팀내 최다 선발승 4위]에 구원 1위[* 삼성의 창단 첫 세이브도 황규봉이 기록했다. 당시는 구원승 + 세이브인 세이브포인트로 기록하였다. (8구원승)]에 올랐다. 원년 시즌의 WAR은 무려 '''8.62.'''[* 스탯티즈 기준.] 하지만 이 때에 200이닝 이상을 던진 여파 때문인지, 이듬해에는 6승[* 5선발승] 4패로 다소 부진했으나 규정이닝을 충족한 130이닝 투구와 3점대 방어율을 기록하였다. 역시 삼성 마운드를 이끌면서 역시 많은 이닝을 소화한 동기 [[이선희(야구)|이선희]]는 ~~[[KBO 리그|프로야구]]의 [[이종도|한]] [[김유동|역사]]를 [[허용투수|쓰고 나서]]~~ 이후로 구위 회복을 하지 못했지만, 황규봉은 다시 재기했다. 1984년에는 10승[* 4선발승] 2패로 승률 1위에 올랐고, 1985년에는 14승[* 모두 선발로만 기록하여 [[김시진]](21선발승), [[김일융]] (20선발승)에 이어 그 해 최다 선발승 3위] 7패를 기록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후기 통합 우승을 경험했다.[* 참고로 황규봉의 오랜 친구이자 원년 불운의 투수였던 [[이선희(야구)|이선희]]는 [[MBC 청룡|청룡]]으로 트레이드되어 친정팀의 우승을 함께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86년에 3승 5패로 성적이 떨어지자 은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