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권 (문단 편집) === [[위(삼국시대)|조위]]에서 === 황권이 투항한 후 [[조비]]가 황권에게 그대는 [[진평]]과 [[한신]][* 진평과 한신은 [[항우]]를 버리고, [[한고제|한고조]]에게 갔던 인물이다. 물론 항우가 이들을 제대로 쓰지 않아서 그랬을 뿐이다.]을 따르려는 것이냐고 묻자 황권은 자신은 단지 패장일 뿐 그들을 감히 따라하는 게 아니라고 답했다. >신은 유주로부터 과분한 대우를 받아 오나라에 항복하는 일은 없었는데, 촉으로 돌아가는 길이 없어서 귀순한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한 군대의 장수로서, 죽음을 면한 것은 다행스런 일인데 어찌 고인을 따라 흠모할 수 있겠습니까? 조비는 황권의 대답에 감동하여 진남장군으로 임명하고, 육양후로 봉했으며, 시중의 관직을 더하고, 그로 하여금 수레에 함께 타도록 했다. 촉나라에 투항한 사람 중 어떤 이가 황권의 처자식이 처형되었다는 말을 했지만, 황권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상을 치르지 않았다. 한진춘추(漢魏春秋)에 이르길 문제(文帝)가 발상(發喪)을 명하였다. 황권이 답하여 말하길 >신에게 선주와 제갈량은 (서로를) 정성으로 대하고 서로 믿어 신의 진심을 (선주와 제갈량은) 명백히 알고 있습니다. 의혹은 사실이 아닐지언대, 청컨대 (자세한 내막을) 들은 후에 발상하겠습니다. 후에 상세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과연 황권이 말한 대로였다. 유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위나라 신하들은 모두 기뻐했는데, 황권만은 그렇지 못했다. 조비는 황권이 도량이 있다고 판명하여, 그를 놀래키려는 생각으로 주위 사람을 보내, 황권에게 출두하라는 칙명을 내리고, 도착하기까지 사이에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다. 말을 탄 사자가 질주하여 길에서 교체했다. 황권 수하의 기종으로 혼비백산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황권의 행동거지와 안색은 태연자약했다. 후에 황권은 익주자사를 겸임하였고, 옮겨 하남을 차지하게 되었다. 대장군 사마의는 그(황권)를 매우 중시했다. 사마선왕이 황권에게 질문을 했다. >촉나라에는 그대와 같은 사람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황권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명공께서 저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깊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주는 편지에서 말했다. >황공형은 호방한 남자입니다. 항상 앉으나 서나 그대를 칭찬하였는데 말을 빌려 어떤 구실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경초 3년(239), 즉 촉나라 연희 2년에 황권은 거기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승진했다. 촉기에 이르길 [[조방]]이 황권에게, "천하는 삼국 정립의 상황인데, 어떤 국가를 정통으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황권은 "천문에 따라 정통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화성]]이 심성이 되어 문황제(조비)가 붕어했지만, 오와 촉의 군주에게는 어떠한 일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라고 답했다. 다음해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경후라고 했다. 아들 황옹(黃邕)이 후사를 이었다.[* 황권과 위나라에 함께 투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황옹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작위는 끊겼다. 황권이 촉에 남겨 두었던 아들 [[황숭]](黃嵩)은 상서랑이 되어 위장군 [[제갈첨]]을 수행하여 등애를 방어했다. 부현에 도착하자, 제갈첨은 주저하여 전진하지 못했다. 황숭은 제갈첨에게 응당 신속하게 가서 요충지를 점거하여 적군의 평지 진입을 저지하도록 여러 차례 권유했다. 제갈첨은 결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황숭은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다. 마침 등애가 신속하게 전진해 왔다. 제갈첨은 퇴각하면서 싸워 면죽까지 이르렀다. 유비가 이릉에서 황권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가 패한 것처럼 제갈첨도 황숭의 간언을 듣지 않았고 결국 전사했다. 황숭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필사의 각오로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