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교익 (문단 편집) == 생애 == [[1962년]] [[1월 30일]],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임곡리에서 태어났다. [[일본]] [[교토]]에서 반찬가게를 경영했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런 탓인지 어릴 적 먹었던 음식이 [[한국 요리|한식]]과 [[일본 요리|일식]]이 섞여 있는 묘한 음식이었다고 하며, 나중에 외식문화를 접하고 나서 자신이 어릴 적 먹었던 음식의 수준이 꽤나 높았던 것을 체감했다고 한다. 또 외식이라도 하게 되면 식구들이 음식 품평을 했을 정도로 집안이 맛에 있어서는 유별났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결국 지방 촌락의 제한된 환경에서 자란 탓에 다양한 요리를 맛보지 못하고 [[일본 요리]] 쪽에만 편향된 입맛을 가지게 되었다는 치부를 자기 스스로 까발린 것이나 다름없다. 편향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까발리다는 비밀들을 속속들이 들추어내다라는 뜻이다. 실제로 황교익은 고작 일부 한국 음식과 일부 일본 음식을 비교하면서 근거도 없이 한국 음식은 미개하다고 비난하는 데만 집착할 뿐, 일본 요리 이외의 양식과 중식, 동남아, 남미의 음식 등 세계 각지의 맛과 문화를 다양하게 다루지 못한다. [[마산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많이 들어 학창 시절 장래희망은 [[시인(문학)|시인]]이었지만, 뉴 저널리즘에 관한 책을 읽은 것을 계기로 많은 독자를 두고 싶은 마음에 [[기자]]의 꿈을 품게 되었다고. 상경 이후 처음에는 서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했지만, 학교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토론을 하는 재미에 '서민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 시절에는 [[연극]]에 눈길을 돌려 연극동아리 연출 활동에 열중했으며, 잠시 배우의 꿈도 품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을 연극과 토론 등으로 바쁘게 보냈으나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고, 결국 졸업 이후 여러 언론사 시험에 낙방한 끝에 [[농민신문]] [[기자]]로 입사했다. [[농민신문]]에 입사하긴 했지만 농사를 지어 본 경험도, 농민으로 살아 본 적도 없었던 황교익은 2년 정도만 하고 퇴사할 계획이었으나, 생각보다 일이 적성에 맞아 13년간 <새농민> 잡지 편집팀장, 전국사회부 팀장 등을 역임했다. [[1990년대]] 초반, 농민신문에서 먹거리 생산에 관련한 글을 주로 쓰던 중 일본 연수를 다녀오게 됐는데, 당시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거품경제]]의 끝을 달리던 [[일본]]은 음식 관련 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TV만 틀면 먹방이 나올 정도였으며, 서점도 음식 관련 서적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여러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경제호황기에 음식문화가 발달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감명을 받은 황교익은 먹거리를 소비하는 소비자 입장에서 글을 써봐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귀국 이후 음식 전문기자로 전향했다. 한국도 조만간 음식에 주목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었고, 2010년대 후반 먹방열풍을 보면 결국 황교익의 예측은 맞아떨어진 셈이다. 사실 황교익이 음식을 논할 때 여러 [[거대담론]]과 접목시켜 평론하는, 즉 칼럼니스트로서의 방향성을 가지게 된 것도 이 시기인데, 마빈 해리스[* 문화 선택 이론을 배경으로 [[근친상간]] 금기 현상을 주장하였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를 읽고 [[인류학]]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 이후 [[2011년]] [[트루맛쇼]] 출연을 기점으로 대중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2015년]] [[수요미식회]] 패널로 출연하면서 음식문화 평론가로 인기를 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