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현 (문단 편집) === 유유의 정변 === 원흥 3년(404) 2월, 일찍이 환현은 건무장군 [[유유(송무제)|유유]]를 후히 대접하고 노닐 때마다 항상 그를 불렀다. 황후 유씨가 환현에게 유유는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 제거해야 한다 경고했지만, 환현은 중원을 평정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황후의 예상대로 유유는 환현 정권을 뒤집으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고, 유도규(劉道規), [[유의(동진)|유의]], 하무기, 왕원덕(王元德), 왕중덕(王仲德), 맹창(孟昶), [[제갈장민]] 등 12명과 거병을 모의했다. 기일이 되자, 유유는 사냥 나간다는 핑계로 성을 빠져나와 하무기와 함께 무리 100여 명을 모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경구성으로 달려가 황제가 보낸 칙사를 칭하며 성 안으로 진입하고, 그곳을 수비하던 안성왕 환수를 참수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광릉을 지키던 청주자사 환홍(桓弘)도 사냥을 나가자는 주부 맹창의 권유에 의심없이 따라나섰다가, 미리 성 밖에서 수십 명의 장사들과 대기하고 있던 유의, 유도규의 습격을 받고 참수당했다. 유유가 경구를 장악한 뒤, 주안목(周安穆)을 건강성으로 파견하면 성내에서 경릉태수 유매(劉邁), 하내태수 신호(辛扈), 홍농태수 왕원덕, 진위장군 동후지(童厚之) 등이 내응할 계획이었으나, 유매가 겁을 먹고 새벽에 환현을 찾아가 거병 모의를 모두 털어놓았다. 결국 반란군의 건강성 장악은 실패해 주안목은 다시 유유에게로 되돌아가고, 유매를 비롯한 신호, 왕원덕, 동후지 등은 전부 주살되었다.[* 유매는 비록 환현에게 모든 것을 일러 바치고 중안후(重安侯)에 봉해졌으나, 주안목을 도망치게 했다는 의심을 사 동료들이 처형당한 바로 다음 날 주살당했다.] 경구에서 거병한 유유는 무리 내에서 맹주로 추대받고 총독서주자사를 자칭했다. 그는 경구에 맹창을 남겨 지키게 한 후, 1,700명을 거느리고 죽리(竹里)에 주둔해 사방에 격문을 뿌렸다. 동궁에 있던 환현은 상황이 급박함을 알고 다시 상궁(上宮)으로 돌아와 관리들을 모두 궁내에 숙직하게 했다. 그리고 신안왕 환겸을 불러 정토도독을 더하고, 둔구태수 오보지(吳甫之), 우위장군 황보부(皇甫敷)를 보내 두 갈래로 반란군의 진격을 막게 했다. 여러 반란을 겪어본 환현이 유독 유유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심하니, 혹자가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환현이 답했다. > "유유는 족히 한 세기의 영웅이라 할 수 있고, 유의는 주사위 도박만으로 백만 전을 벌었을 정도로 운이 좋으며, 하무기는 그의 장인인 유뢰지와 재능이 맞먹으니, 함께 대사를 도모하면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는가!" 원흥 3년(404) 3월, 오보지가 먼저 강승(江乘)에서 유유의 군대와 만나 전투를 벌였다. 오보지는 타고난 맹장으로 그가 이끄는 병사들 역시 하나같이 기세가 날카로웠으나, 대장인 유유가 직접 선두에 서서 긴 칼을 뽑고 적군을 풀 베 듯이 쓸어버리자, 유유의 병사들도 사기가 크게 올라 힘껏 싸운 끝에 적군을 격멸시킬 수 있었다. 유유는 오보지를 그 자리에서 즉시 참수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나락교(羅落橋)에 이르렀다. 그때 황보부도 수천 명의 병력과 나락교에 도착해 유유의 장수 [[단빙지]]를 죽이는 활약을 했지만, 유유에게 달려들다가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두 장수가 전사했다는 보고를 들은 환현은 두려움에 떨며, 도사들을 불러모아 앞날을 묻고 유유를 저주하게 했다. 그리고 대신들을 불러모아 물었다. > "짐이 패했는가?" 조정지(曹靖之)가 답했다. > "귀신이 분노하고 사람들이 원망하는데,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환현이 다시 물었다. > "어째서 사람들이 원망하고, 귀신이 분노한 것이냐?" 조정지가 답했다. > "진나라의 종묘를 함부로 옮겨 민심이 떠난 것이고, 대초(大楚)의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아 조상신이 분노한 것입니다." 환현이 물었다. > "경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간언하지 않았는가?" 조정지가 다시 답했다. > "수레에 올라 지금이 요순의 시대라 지껄이는 자들만 가까이 두시니, 신이 어찌 감히 그 앞에서 간언하겠습니까!" 환현은 조정지로부터 쓴 소리를 듣고 더더욱 두려움이 깊어져, 신안왕 환겸, 유격장군 하담지(何澹之)를 보내 동릉(東陵)에 주둔시키고, 후장군 변범지를 복주산(覆舟山) 서쪽에 주둔시키니, 그 무리가 도합 20,000이었다. 다음 날, 유유가 복주산 동쪽으로 진군해, 병사들 중 허약하거나 늙은 이들을 골라 깃발을 들게 하고, 복주산을 오르게 했다. 복주산 위로 올라간 유유의 병사들이 산 위에 기치(旗幟)를 늘어놓고 이를 의병(疑兵)으로 삼자, 마치 병사들이 산과 골짜기를 빼곡히 메운 것처럼 보였다. 정찰병이 이 광경을 보고 돌아와, 환현에게 적의 수를 알 수 없다 보고하니, 환현은 더욱 근심하며 무위장군 유이지(庾頤之)에게 정예병을 주고 환겸과 변범지를 돕게 했다. 당시 환겸 등이 이끌던 병력은 원래 북부병 소속의 병사들로 유유와 싸울 마음이 아예 없었다. 유유와 유의가 부대를 여러 개로 나누고, 마침내 공격을 개시해 환겸의 진영으로 돌격했다. 유유가 이번에도 앞장서서 싸우자, 그의 장수와 병사들 역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일당백을 자랑했다. 유유군의 고함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고, 때마침 부는 북동풍을 이용해 환겸의 진영에 불까지 놓으니, 화염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으면서 환겸의 초군은 혼란에 빠져 일시에 무너졌다. 환겸의 패전 소식을 들은 환현은 자신의 측근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액문(南掖門)으로 건강성을 빠져 나왔다. 참군 호번(胡藩)이 우연히 도망치는 환현과 마주치자, 환현의 말고삐를 붙잡으며 말했다. > "우림(羽林)의 사수 800명이 있고 서부병도 아직 남아있는데, 이들을 내몰아 싸우려 하지 않고 어딜 가시려 하십니까!" 그러나 환현은 대답도 하지 않고, 호번을 뿌리친 채 석두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은중문이 미리 준비해둔 배에 올라, 장강을 타고 남쪽을 향해 달아났다. 한편, 유유는 환현이 버리고 간 건강성을 차지해, 초나라의 신주를 불사르고 진나라의 신주를 새로 만들어 태묘에 들였다.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건강에 남아있던 환권(桓權), 환홍(桓洪) 등 환현의 친척들은 전부 유유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유유는 유의, 유도규, 하무기를 파견해 도망친 환현을 계속 추격하게 하고, 상서 왕하를 보내 심양에 유폐된 안제 사마덕종을 다시 건강으로 모셔오게 했다. 하지만 환현이 먼저 심양에 도착해, 강주자사 곽창지로부터 군수품과 병력 지원을 받고, 평고왕 사마덕종을 강제로 데리고 [[형주|강릉]]으로 도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