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남사변 (문단 편집) == 다른 시각 == 그러나 공산당의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상해 사변 당시에 [[천두슈]]를 기반으로 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국제당(제3인터내셔널)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과 긴밀한 협력만을 강조하다가 한꺼번에 털렸기 때문에 당시 중공의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언제든 다시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경계심에 국민정부군 수준과 비슷한 항일전을 쉽게 치를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또한 위에 신사군의 병력이 10만이라고 쓰여진 것은 관련 국민정부 추정치가 있기 때문에 틀린 말이라고 볼 수 없지만, 중국 공산당 계열의 군대의 수가 2년 지난 시점에서 140만이라는 것은 명확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확실한 것은 당시 국민정부군의 군사력에 비하면 상당히 쪽수도 부족하고, 물자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다라는 게 정설이다.[* 강현사 저, 『抗日戰爭時期 新四軍 연구 : 統一戰線 정책을 중심으로』(고려대-박사, 2004년) p. 64 ]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에게 국민당과 비슷한 수준의 항일을 하라는 것은 그야말로 공산당에게 '자멸'을 요하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40년 5월 당시의 5.4 지시로 반공파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설명도 있는데, 이는 6월에 다시 주은래를 기반으로 한 온건적 타협파(급진적 타협파는 왕밍이 아닌)들에 의해 철회된 주장이다. [* 강현사 저, 『환남사변과 통일전선 : 발발 원인을 중심으로』(중국근현대사학회, 2002년) p. 7] 또한 위의 글 중에서 2차 국공합작 직후 공산당이 지방군벌들에 대한 공격을 대대적으로 감행했다는 것에 대한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 안에서도 내부의 의견 차로 인해 사소한 다툼이 자주 일어났었고, 이러한 사소한 싸움의 시작을 일률적으로 모두 공산당의 탓으로 몰 수 있는 자료,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