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남사변 (문단 편집) == 장제스의 최후통첩 == 항일보다 세력 확장에만 여념이 없는 공산당의 모습에 국민당 사무총장이 공식적으로 공산당이 항일 투쟁에서 한 것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공산당은 1940년 8월 [[백단대전]]에서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마오쩌둥은 백단대전이 자신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며 크게 화를 냈고 작전을 주도한 [[펑더화이]] 등을 질책했다. 일단 1940년 시점에서 장제스가 가장 눈엣가시로 여겼던 것은 신사군이었다. 수가 장장 10만명으로 불어난 신사군은 국민당의 거점이던 [[난징]], [[상하이]] 등지에서 활개치고 다니며 국민당의 기반을 흔들고 다녔는데 이는 엄연한 협정 위반이었고, 장제스의 핵심 본거지인 상하이와 난징에서 공산당이 설치고 다닌다는 것은 다른 반장 세력의 반기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런 신사군을 치워버리는 것은 반장세력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1940년 9월 군사위원회는 신사군을 [[황하]] 이북으로 물릴 것을 요구했다. 공산당은 비정규군을 옮길 수 없다고 거부했고 군사위원회는 12월 31일까지 신사군을 강북으로 옮기고 1월 30일까지 황하 이북으로 옮기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바이충시]]는 신사군 축출에 무력이 필요하다고 단언했고, 장제스는 만약 신사군이 말을 듣지 않으면 섬멸해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더 이상 신사군이 설치게 놔두는 것은 자존심은 둘째치고 장제스 정권에 위협이 될 판이었다. 장제스가 정말로 열받았다는 것을 안 공산당은 [[저우언라이]]를 통해 안전한 퇴로를 보장받았고 이에 주더는 신사군을 철수시켰다. 만약 신사군이 협정을 지키지 않을 시에 즉각 공격하기 위해서 국민당 지휘관들은 눈에 불을 켰다. 눈바람이 몰아치는 1941년 1월 4일 신사군 사령부의 병력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발걸음은 [[장시 성]]의 옛 공산당 유격 요새로 향하는 듯했으나, 그 와중에 국민당 정찰대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저우언라이가 즉각 항의했지만 장제스는 자신이 안전을 보장했다는 이유로 공격 보고를 거짓말로 치부했다. 굶주린 신사군 1만명은 스징이란 마을에 포위되었고 신사군 사령관 예팅은 장제스에게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전보를 보냈으며 징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장제스는 두렵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1941년 1월 12일 국민당 7개 사단의 맹공이 시작되었고 전투가 다 끝난 1월 14일에 마오쩌둥은 장제스와의 휴전이 합의된 것이란 전보를 보냈다. 예팅을 비롯한 3천명이 포로가 되었고 최소 3천에서 최대 7천명[* 필립 쇼트의 경우 9천 명이 살해되었다고 본다.]이 살해되었으며 2천명만 겨우 도주에 성공했다. 포로들은 가혹하게 대우받았고 예팅은 5년간 수감되어 있다가 1945년에야 석방되었지만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이 참사는 국공합작의 숨통을 끊어놓는 계기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