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남사변 (문단 편집) == 배경 == 중국 공산당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했고 국민당은 공산당에 국가 안의 국가와도 같은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는 통 큰 양보를 한 바가 있었지만 양측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애초에 둘은 서로를 믿지 않았는데, [[장제스]]는 여전히 ‘붉은 고질병’을 뿌리뽑을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며 [[마오쩌둥]] 역시 중국의 지배자가 되려는 꿈을 단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공산당은 군사위원회가 지정한 팔로군의 활동 영역을 무시하고 화북에서 자꾸만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홍군의 활동은 항일 투쟁이 아닌 공산당 통치 지역의 확대였다. 홍군은 전쟁 초기에는 [[옌시산]]의 지휘 하에 배속되어 항일 투쟁을 하였고 [[평형관 전투|평형관 등에서 승전보]]를 올렸지만 거대한 중일전쟁을 돌아보자면 보잘것없는 국지전에 불과했다. 해방구 확대에 나선 결과, 중일전쟁이 일어난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공산당은 수만 단위의 소규모 군대에서 140만 대군을 보유하고 1억명의 인구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의 세력은 화북을 넘어 항일과 관계없는 서북 지역으로 뻗어갔고 장강 중, 하류에 미쳤다. 이러한 행보에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왕밍이 항전의 실질적 여력은 국민당에 있으며 항일의 역량을 위해 '''충칭정부에 복종함으로서 통일전선에 모든 일파를 결집시켜야 한다'''며 반발했지만, 마오쩌둥과 [[류사오치]]는 그를 우경 투항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실각시켰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힘의 70%를 역량 확대, 20%를 국민당 투쟁, 10%를 항일 투쟁에 쓸 것을 지시했고 홍군은 이에 따라 움직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이미 실각한 왕밍과 [[주더]]까지도 크게 반발했지만, 마오쩌둥은 1942년의 정풍 운동을 통해 자신의 반대파들을 남김없이 숙청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