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평옹주 (문단 편집) == 여담 == *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혜경궁]]의 장남 [[의소세손]]이 화평옹주의 탈상[* [[삼년상]]이 모두 끝나 상복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인 달에 태어나자 영조는 이 손자까지 반기지 않았다. 부모가 된 아들 내외에게 흔히 하는 "네가 어느 사이 자식을 두었구나. 아들을 낳았으니 기특하다" 같은 덕담 비슷한 것도 없었고, 영빈 이씨가 혜경궁 홍씨의 [[산후조리]]를 돕자 죽은 딸은 잊고 손자 태어난 것만 좋아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사도세자가 [[효장세자]] 사후 7년만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고 갈수록 왕실의 남계 후손이 줄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영조의 이런 행동은 납득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손자 대접도 안하던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 --그냥 영조가 영조한 거--] 그러다가 갑자기 영조가 의소를 예뻐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들이닥쳐 의소의 옷을 풀더니 어깨에 있는 점을 보고는 화평옹주도 여기에 점이 있었다며 이 아이는 옹주의 환생이라고 믿고 기뻐했다는 것. 그리고 언제 푸대접했냐는 듯 100일 전후에 바로 원손으로 책봉해버리는 행동력까지 보여서, 혜경궁도 아끼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과했다고 평했다. --이쯤되면 [[딸바보]]도 아니고 그냥 무섭다-- 애석하게도 영조가 화평옹주의 환생이라고 기뻐했던 이 세손은 전생(?)보다도 훨씬 더 이른 나이에 또 요절해 버리고 만다. * 실제로 의소를 가졌을 때 어느 날 혜경궁이 화평옹주가 생전 그대로처럼 방에 들어와 앉거나 웃고 얘기하는 생생한 [[태몽|꿈]]을 꾸었다고 하며 불길한 징조인가 하다가 임신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 [[1743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사찰 불암사 목조석가여래좌상[* 2018년 12월 19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다.] 개금불사에 남편 박명원과 함께 대시주자로 동참한 기록이 있다. 이 불암사는 후일 의소세손의 원당이 된다. 이걸 보면 화평옹주와 의소세손이 인연은 인연인 듯. * 화평옹주의 사후에 시[[조카]] 박상철이 그녀의 [[양자]]로 입적된다. 훗날 그가 [[과거]]를 보아 명단에 이름을 올리자 영조는 내 손자가 왔다며 감격했다고 한다. -- 진짜 무섭다.-- -- 피 한방울 안 섞인 양손자에게 이러면서 친아들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