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평옹주 (문단 편집) === 혼인 === 1738년(영조 14) 2월 17일 초간택, 2월 25일 재간택, 2월 30일 삼간택을 진행하였다. ||전 참의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 감사 조석명의 아들 조재약, 주부 유은의 아들 유정양 ---- 재간택 명단[* 승정원일기, 영조 14년 2월 25일. [[http://sjw.history.go.kr/id/SJW-F14020250-01500|#]] ] || 이 중에서 참의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이 [[부마]]로 [[간택]]되었다.[* 중상학파 실학자의 거두이자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실학자)|연암 박지원]]의 8촌 형이다. 박지원이 당시 변변한 벼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에 다녀와서 열하일기를 쓸 수 있었던 것도,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된 박명원이 박지원을 자제 군관(일종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신단에 넣어줬기 때문이다.] 초간택과 재간택 명단에서 박명원의 이름이 계속 첫번째로 언급된다.[* 보통 이런 경우는 처음부터 부마감으로 눈에 들어 점찍어 놓았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될 때도 명단에서 제일 첫번째로 언급된다.] 영조의 딸사랑이 지나쳐 말이 많았는데 [[숙빈 최씨|자기 친모]]의 자택이었던 [[이현궁]]을 화평옹주의 신혼집으로 주기 위해 고칠 정도였다. 다만 신하들이 이현궁은 [[어의궁]]보다도 더 크다고 간언하고 옹주도 이현궁은 과분하니 받지 않겠다고 해서 다른 궁을 내려주었다. 그 외에도 화평옹주의 집을 수리하기 위해서 [[경복궁]] 터에 있는 나무를 베어다가 목재로 쓰게 하는 등 혼인할 때도 예물이 화려하고 풍성했다. 이 때 [[숙녕옹주(효종)|숙녕옹주]](효종과 안빈 이씨의 딸)의 남편 금평위 박필성[* 효종의 사위가 이때까지 살아있나 싶을텐데 박필성은 1652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1747년인 '''96세'''까지 장수하였다. 당시 박필성은 87세의 고령이긴 했다.]이 왕녀들의 주혼(主婚)[* 혼인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것. 원래 신부의 아버지가 한다. 하지만 왕은 나랏일을 하느라 바쁘므로 직접 자식의 혼인을 챙길 수 없고, 부마 집안과 신분 차이 때문에 서로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왕녀가 혼인할 때는 종친 중 한 사람이 왕을 대신해 혼인을 주관하는 게 관습이었다.][* 주혼의 다른 예를 들자면 [[선조(조선)|선조]] 사후 [[광해군]] 대의 왕녀 주혼은 종실의 맏이이자 선조의 5남인 [[정원군]]이 주관하다가 정원군 사후, 그 다음 종실의 어른이되는 정원군의 막냇동생인 [[의창군(1589)|의창군]]이 이어받아 주관하였다. 인조 사후, 왕녀 주혼은 [[인평대군]]이 주관하였으며 그 사후에는 [[소현세자]]의 3남인 [[경선군]], 그 다음은 인조의 7남인 [[숭선군]], 8남 [[낙선군]], 숭선군의 2남인 종친 [[동평군]] 이항이 주혼을 맡게된다]을 맡았는데, 박필성은 "숙녕옹주의 혼인 때보다 [[화순옹주]]가 혼인할 때 예물이 열 배는 풍성했고, 화평옹주가 혼인할 때는 화순옹주보다 더 풍성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8월 2일 갑신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408002_001|#]]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