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타 (문단 편집) == 정사 == 사실 화타는 전업 의원이 아니었다.《[[정사 삼국지]]》의 <화타전>에 그는 서주의 유명 인사였으며 여러 경전에 통달한 학식 있는 유생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양생의 방법에 밝았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화타의 나이가 백 세 가까이 되었지만 장년의 용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패국의 재상 [[진규]]가 화타를 효렴으로 천거하였고, 태위인 황완이 그를 조정에 출사하도록 불렀지만, 화타는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당고의 화]]와 같은 비극이 비일비재했던 불안정한 중앙 정부에서 굳이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까지의 의술은 어떤 병이든 간에 침 혹은 내복약을 사용하고 그걸로 끝이었다. 화타가 살던 시대는 침구학 및 경혈학 자체가 발전 도상에 있는 단계였고, 침구학의 일차적인 완성은 [[서진]]시대의 황보밀이 침구갑을경을 저술함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내복약 사용의 일차적 완성, 즉 [[상한론]]의 완성은 화타가 사망한 뒤인 210년으로 학자들은 보고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화타는 특수한 탕약인 마비산(麻痹散)이라는 마취약을 사용하고 외과 수술을 행하여 병의 근본 원인을 적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전한다. 삼국지 시대에 [[마취]]를 이용한 외과 수술을 실행한 것이다. 약 먹어 50년 걸릴 병을 한 번 수술에 끝장내니 신의로 추앙받을 만하다. 화타가 실제로 개복 수술 정도의 외과 수술을 수행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존재하는데, 마비산을 복용시켜 환자의 정신을 잃게 한 후, 복부를 절개하여 장기의 일부를 도려내고 실로 봉합하여 수술을 마친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대의 외과 수술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있다. 하지만 현대 외과 수술의 핵심 중 하나인 [[소독]]과 [[수혈]] 부분의 언급이 없어, 실제 화타가 위 내용대로 수술을 시행하였다 하더라도 사망률이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타가 수술을 어디서 배웠다는 기록도 없고 제자에게 전수되지도 않아 거의 전설적 인물로 추앙된다는 점 또한 화타가 정말로 외과 수술을 하였는지 의심이 들게 한다. 다만 이집트, 그리스 로마, 인도 문화권에서도 대마, 아편 등을 이용하여 진통 및 마취를 한 기록도 있고, 인도 경전에 마취, 절개, 봉합의 순으로 이어지는 수술 기록이 많이 전해지며[* 불교 경전의 지바카 코마라밧차의 경우에는 누구에게 배웠다는 내용이나 몸 내부를 볼 수 있는 막대기 등의 내용도 있어 화타의 내용에 비해 좀 더 구체적이다.][* 인도에서는 수술 도구로 추정되는 유물이 상당히 발굴되며, 고대 인도에서 죄를 범하면 코가 잘리는데, 이마 쪽 피부를 잘라 이식하여 코를 다시 복원하는 등 외과 수술이 실제로 수행되었다. 그것도 '''[[기원전]] 800년경에''' 말이다. [[유럽]]에서는 [[15세기]]경부터 이런 비슷한 수술을 시행하였다.], 남미 등지의 미라에서 외과 수술 흔적이 발견되는 등, 고대 시대에 외과 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상황에서 중국 고전에 나와 있는 화타에 의한 수술 기록을 완전히 허구라고 단정 짓기 어렵기는 하다. 한대에는 [[실크로드]]로 로마, 인도 등이 모두 중국에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의술 역시 영향을 주고받았을 수 있다. 그 외에도 동물의 몸동작을 보고 건강 체조를 고안하여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체질을 건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전해지는데, 곰 체조, 호랑이 체조, 사슴 체조, 원숭이 체조, 새 체조 등 다섯 동물의 동작을 본따 [[오금희]]라고 한다. 이는 중국에서 아직도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화타는 [[위(삼국시대)|위나라]]에서 활동하였으나,《[[삼국지연의]]》에서는 [[위(삼국시대)|위]], [[촉한|촉]], [[오(삼국시대)|오]] 전부에서 활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의사를 편력의(遍歷醫)라 하며 쉽게 말해 '출장 의사'라고 할 수 있다.《[[사기(역사책)|사기]] 열전》의 <[[편작]] 열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덧붙이면 이 시대에 살았던 [[장중경]]도 본업은 의사가 아닌 장사 [[태수]]였다고 한다.] 물론 실력은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력과 그 이상의 소문이 본인에게 재앙을 불러왔다. 208년 무렵, [[조조]]가 중병이 들어[* '''두풍(頭風)'''이라고 하는데, 증상이 심하고 길게 지속되는 [[두통]]을 뜻한다. [[https://www.yuhan.co.kr/Introduce/Health/?Cateid=290&mode=view&idx=2889&ref=2880&p=1&sm=-1&listUrl=%2FIntroduce%2FHealth%2Findex%2Easp%3FCateid%3D290%26Idx%3D2880%26Make%5FDate%3D2007|유한양행에서 발간한 '건강의 벗' 2007년 11월호 참고]]] 화타에게 자신을 치료해 달라고 청했으나 그는 한 번 와서 이 질병은 단기간에 치료하기는 어렵고, 장기간 치료해야만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하고 증상이 조금 호전되자 부인의 병환을 핑계로 돌아가, 그 후 아내가 위중하여 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몇 번을 다시 불러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는 정확하게는 差라고 쓰였다. 즉 어느 정도 차도를 보였다는 이야기. 꾀에 밝은 조조는 몇 번이고 거부하자 이를 수상하다고 여겨 군현의 관리에게 명령하여 화타를 보내도록 했다. 화타는 자신의 본령을 견지하고 다른 사람을 모셔 녹을 먹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길에 오르지 않았다. 조조는 매우 노하였으며, 사람을 보내 가서 살펴보도록 했다. 만일 화타의 처가 정말로 병에 걸렸다면 팥 열 섬을 내리고 휴가 기한을 더 늘려주도록 하고, 만일 그것이 거짓이라면 체포하여 압송하도록 했다. 그의 상황을 살피게 했는데, 과연 아프다는 아내는 오히려 말짱하고 화타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화타는 허현의 감옥으로 넘겨졌으며, 심문을 받고 죄를 시인했다. 이에 분노한 조조는 그를 즉시 하옥시켰고, 결국 화타는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의사로서의 재주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조조의 일등 모사인 '''[[순욱]]'''이 재주가 아까우니 "화타의 의술은 확실히 매우 정통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는 바이니 그를 당연히 용서해야 합니다."라고 살리자고 탄원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조는 걱정하지 말라며 천하에는 이런 쥐새끼 같은 자가 없어야만 한다고 화타를 가혹하게 고문했다. 화타가 죽으려고 할 때, 책 1권을 꺼내 옥의 관리에게 주고 이 책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했지만 옥의 관리는 법을 범하는 것이 두려워 받지 않았고, 화타 또한 강요하지 않고 불을 찾아 태워버렸다. 화타가 죽은 후에도 두통이 사라지지 않자 조조는 "화타는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데, 나의 병을 고쳐 스스로를 높이려고 했다, 내가 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도 끝내 나를 위해 이 병의 근원을 잘라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중에 조조가 사랑하는 아들 창서(倉舒)[* [[조충]]의 자(字)]가 질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필경엔 조조마저 땅을 치며 후회했다고 한다. 화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가 가장 총애하던 아들인 [[조충]]이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화타를 처형할 때 조충이 앓아눕게 되어 조조가 부랴부랴 처형을 취소했으나 명령이 사형장에 도달하기 직전 화타가 처형당했다는 [[야사(역사)|야사]]도 있다. 사실 그 외에도 야사는 무지막지하게 많다. 조조를 고쳐주려고 약을 만들어봤는데, 그 약이 극약이라 맛보다 본인이 먼저 가버린 게 왜곡되었다는 이야기 따위 말이다. 《[[후한서]]》에서는 '常在左右'라고 하여 '오만하고 자기 재능을 과신하여 위정자들 밑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니 그냥 조조 밑에서 일하는 게 싫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조조의 병은 화타 입장에서는 '치료 불가능'이었을 가능성도 크고 화타가 성격적으로도 얽매이고 몸을 굽히기 싫어하는 두 가지가 다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화타가 출세욕이 강하거나, 아부를 잘하거나, 혹은 권력의 냉혹함을 잘 알거나 눈치를 잘 살피거나 조조의 잔혹함을 실감하거나 했다면 조조에게 달라붙지 않더라도 차라리 도망을 치건 어떻게든 방도를 마련했거나 눈치라도 열심히 살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조가 잔혹하게 군 것과 별개로 화타의 생존에는 화타 자신의 성격적인 문제도 아예 없다고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후한서]]》에 나오는 조조의 병은 상술했듯이 '''두풍(頭風)'''이었는데, 현대의 삼차신경통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완치가 불가능할 가능성이 꽤 높고, 차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긴 하나 일시적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설령 화타 본인의 주장대로 완치가 가능하더라도 조조 본인의 상황을 볼 때 스트레스가 엄청나기에 재발이나 악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렇다고 은퇴하여 요양에만 전념할 상황도 아니었다.[* 화타가 장기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으면서도 조조를 떠난 것은 결국 치료하다 보니 조조는 장기치료해도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거나 장기치료가 지루하거나 권력자에게 매여있는 일 자체를 싫어했다거나, 아니면 어떤 이유로 조조 자체를 좀 싫어했거나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하단의 일화가 판타지 같긴 하나 그래도 믿는다고 하면 그 중에서 님 어차피 수술해도 10년 이내에 죽는 건 변함이 없고 그냥 고통만 없어지는 건데 그냥 참고 사시지? 같은 말을 한 걸로 보아 잔여수명에 영향이 없이 통증만을 없앤다거나 하는 치료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다. 판타지 일화 같긴 해도 전해지는 일화대로 화타가 잔여수명 예측을 잘 했다면 208년 무렵에는 조조의 수명이 12년 정도 남아있는데 두통만 없애는 치료, 그것도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잘 듣지 않는 환자 상대로 장기치료의 경우 화타 본인 생각에는 무의미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후한서]]》에는 몇 가지 치료 예시가 나온다. 그중에는 광릉태수 [[진등]]이 날생선을 먹고 걸린 [[기생충#s-1]] 질환을 고쳐준 이야기가 있다. 그는 진등에게 '지금은 내가 있어서 치료를 해줬으니 살았지만, 날생선을 먹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나중에 재발하여 요절하게 될 것이다'고 조언했는데, 결국 3년 뒤에 화타가 사망한 뒤 진등은 병이 재발하면서 병사했다.[* [[정사 삼국지]]에는 이렇게 나온다. '광릉태수 진등이 병이 들자 가슴속에 고민이 가득하였으며 안색이 붉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화타는 그의 진맥을 보고 말했다."당신의 위 속에 있는 몇 되의 기생충이 안에서 악성 종기가 되려고 하는데, 날것을 먹어서 생긴 것입니다." 즉시 두 되의 탕약을 만들어 먼저 한 되를 복용하게 하고, 조금 있다가 전부 복용하도록 했다. 탕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세 되의 기생충을 토했는데, 붉은색 머리는 모두 움직이고 있었으며, 반쪽은 아직 물고기를 얇게 저민 모습을 하고 살아있었다. "이 병은 3년 후에 또 재발합니다. 그때 훌륭한 의사를 만나면 치료할 수 있습니다." 과연 화타가 말했던 기일에 병이 재발하였는데, 그 당시 화타가 죽어서 치료하지 못했다.] 옥중에서 자신의 의술을 집대성한 책인 청낭서(靑囊書)를 옥리에게 건네 의술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가 두려워 받지 않았고 이에 책을 태워버렸다고 전한다.[* 후술하겠지만《[[삼국지연의]]》에서는 옥리가 책을 받고 집에 가져갔지만, 남편이 화타와 같은 죽음을 맞이할까 봐 걱정한 아내가 태워버렸다고 나온다.] 하지만 화타는 실제로 직전 제자가 둘 있었기 때문에 아마 이 이야기는 거짓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둘은 광릉 사람 [[오보(삼국지)|오보]]와 팽성 사람인 [[번아]]인데, 후한서에는 오보가 오금지희를 전수받고 번아는 침술과 처방 중 일부를 전수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 시대가 도제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할 때 완전한 전수인지 아닌지는 의문이다. 그의 저서로는《침중구자경》,《관형찰색삼부맥경》,《화타내사》,《화타방》,《청낭서》등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모두 유실되어 일부 내용들만이 다른 의서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진수(역사가)|진수]]는 화타의 진료, [[두기(조위)|두기]]의 음악, [[주건평]]의 관상술, [[주선(삼국지)#s-1|주선]]의 꿈풀이, [[관로]]의 점괘는 진실로 모두 현묘하고 정교하며 비범한 기술이고 옛날 [[사마천]]이 [[편작]], [[창공]], [[일자]]의 전을 지은 것은 불가사의한 것을 포괄하여 기록하고자 한 것이며 때문에 자신 역시 이런 것을 기록하였다고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