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신백화점 (문단 편집) === 화재 이후 신관 건설 === 초저녁 도심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백화점 2동이 통째로 불에 휩싸이고 총독이 직접 나서 진화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등, 오늘날로 치면 [[숭례문 방화 사건]]과 맞먹을 이 화재는 어이없게도 작은 촛불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서관 옆에는 대창무역 소유의 공터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던 과일 노점상이 놓았던 촛불이 사과를 덮은 겨에 옮겨붙고[* 당시 과일의 완충재로 많이 쓰였고, 거의 1980년대까지 쓰이다가 스티로폼으로 대체되었다.], 그 불이 서관 외벽의 목재 광고판에 옮겨붙고, 서관을 황폐화시킨 다음 연결통로를 타고 동관까지 옮겨붙은 것. 그나마 분리되어 있는 건물 구조 덕에 대화재에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사건 후 박흥식은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찾아가 "백화점 2동이 타버리는 동안 종로소방서는 무얼 하고 있었냐"며 압박했고, 결국 책임을 피할 수 없었던 총독은 '500여명에 달하는 점원을 놀릴 수 없으니 건너편의 [[서울종로경찰서|종로경찰서]] 구관[* 현재의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 본점 자리. 여담으로 박흥식은 이 자리까지 사들여 아케이드 구조의 신신백화점을 세워 영업구역을 확대했다. 지금의 모습은 [[SC제일은행|제일은행]]이 잘 나가던 시절 신신백화점이 철거된 자리에 새 건물을 올려 이사해 온 것.]을 빌려달라'는 박흥식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한편, 이 사건을 기점으로 같은 해 한국에 [[119]]가 처음 도입[* [[일본]]은 1927년 처음 도입.]되는 등, 한반도의 엉성한 소방 행정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영업은 재개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던 만큼, 우선 그나마 반소된 동관부터 증⋅개축에 들어가 1936년 12월 동관 일부를 다시 개장했다. 이 때 두 번 다시 불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건물에 셔터와 비상계단을 설치한 것이 포인트였다고. 한편 완전히 타버린 서관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이렇게 된 이상 새로 짓기로]] 결정, 아예 문제의 대창무역 부지까지 사들여 연건평 2,000평이 넘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신관을 완성시켰다. 참고로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신관이 완성된 1937년 10월, 이제는 그 덩치에 맞지 않는 '상회'라는 이름을 떼어버린 화신백화점은 구관[* 화재 후 수리해서 쓰고 있던 동관.]과 신관을 합쳐 연건평 2,500평에 달하는 명실공히 당시 한반도 최대 크기의 백화점 자리에 올랐다. 구관 시절의 조잡했던 배치 대신, 넓어진 면적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각 층마다 최소한 15개 부류로 상품 진열을 나눠 구분하고 매장의 통로 좌우면에 쇼윈도를 두어 상품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하는 등 우리가 떠올리는 [[백화점]]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매장 안에 [[엘리베이터]] 4대, 그리고 [[에스컬레이터]] 2대를 '''조선 최초로 설치'''하는 한편 건물 옥상 정면에는 전광판을 설치해 그날 그날의 뉴스를 내보내는 등 당시 남촌에 밀집한 [[일본]]계 백화점들에 전혀 밀리지 않는 편의시설 혹은 볼거리를 갖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효과를 노렸고, 경성전기주식회사[* 일제강점기 [[서울전차]]를 운행했다. 1961년에 이 경성전기와 조선전업, 남선전기 3사를 합병하여 현재의 [[한국전력공사]]가 탄생했다.]와 협의해 전차정류장 이름을 “화신앞입니다”로 해서 백화점의 선전 효과를 거두었다.[* 전차정류장을 거쳐 버스정류장의 이름으로 이어진 '화신앞'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건물이 철거되고 난 90년대 중반까지도 건너편의 [[종로서적(1907년 기업)|종로서적]]과 함께 약속장소의 이름으로 불렸었다. 화신앞 버스 정류장 이름은 지금 종로2가가 되었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화신백화점 터 근처 [[수도권 전철 1호선|1호선]] [[종각역]]을 '''화신앞역'''으로 역명을 붙인 격이다. 현재는 [[부역명 유상판매 정책]]으로 상업시설을 부역명으로 붙이는 건 가능하지만, 주역명은 불가능한 점을 보면 현대 시각에서도 꽤 대담한 홍보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사례가 화신백화점이 지어지기 전 일본에 이미 있었는데, 바로 [[도쿄메트로 긴자선|긴자선]] [[미츠코시마에역]]이다. 이쪽은 [[미츠코시 이세탄|미츠코시]] 백화점이 지하철역 건설비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붙인 것인데, 시기상 박흥식이 벤치마킹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시도는 종로 [[종각역|보신각 네거리]] 한복판[* 보신각은 화신이 있던 자리의 대각선쪽 블럭 끝에 있다.]이라는 입지조건과 시너지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건축학적 가치로서 보았을 때는 절충주의 양식 아래 최상층의 아치 처리와 처마끝 처리 효과 등 건축 양식 측면에서도 매우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화신백화점 신관은 우리나라 사람이 설계한 최초의 서양식 상업 건축물이라는 데 최고의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경영난을 겪고있던 평양백화점을 인수해서 [[평양제1백화점|화신백화점 평양점]]을 차렸고, 1938년 4월에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영친왕]]과 영친왕비 [[이방자]]가 이왕직 장관 외 다수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화신백화점에 임어(臨御)하기도 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렇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조선 각지에서 물자들을 강제공출해나갔는데 화신백화점도 이를 피해갈수는 없어서 1944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운영에 큰 차질이 빚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