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북분리공작 (문단 편집) === 일본 군부의 소련 공포증 === 이때 일본 군부는 히로타의 대미 교섭을 적극 지지하였는데 이는 일본 군부에 만연한 소련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일본 군부는 소련의 군비가 무섭게 팽창하고 있음을 경계하였고 1933년 9월 29일 참모본부 작전과장 스즈키 요리미치가 소련을 상대로는 '필승의 신념'을 견지하기 어렵다고 상신하였으며 12월 13일, 주소 일본대사관 무관 가와베 토라시로가 참모차장에 "지금 소련의 군비가 마치 만주 또는 제국 본토를 위협하는 듯한 기세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관동군은 종래의 비적 토벌을 위한 분산형 치안유지 배치로는 만주 방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934년 4월 소련군에 대응한 집단방위형 배치로 전환하였으며 만주국의 정책이나 첩보활동도 치안유지에서 대소 첩보활동으로 선회하였다. 소련의 극동 전력은 날로 증강되었고 관동군은 대소전 계획에서 소련군이 최대 25만명을 동원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 관동군에 이에 맞서 25만명, 하다못해 그 3분의 2에 해당하는 병력이라도 확보해야 하며 동부에서는 재래식 보병을 동원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고 서부에서는 기계화부대를 이용하여 몽골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상정하였다. 이를 위해 관동군은 내몽골, 차하얼, 산서를 비롯한 내몽골 방면 지역을 배후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1936년 3월, 관동군 참모본부 제1과 작전과장인 사카니시 가즈요시는 해군 측에 관동군은 병력을 북만주에 집중시켜 외몽골과 산서성의 중국군을 격파함으로 소련과의 전쟁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다고 전달했고 이를 위해 화북 5개성을 만주국과 중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설정하여 소련전에서 측방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한다고 밝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