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북 (문단 편집) == 역사 == '''[[중국 문명]]의 발상지였으며, [[중국사]] 내내 정치적 중심지다.''' 상고 [[주나라]] 이래부터 [[고대]] [[한나라]]까지 이곳의 '오랑캐'들을 몰아내고 어느 정도 개발을 해놓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장강 주변과 몇몇 거점도시에나 확실하게 통치력이 미쳤고, 나머지 화남 지역 대부분은 과장 좀 보태서 야만족의 땅이었고 미지의 땅이었다. 이는 [[후한]]의 [[후한 13주|13주]],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당시의 [[오(삼국시대)|손오]]도 마찬가지였으며, [[촉한]]과 [[오나라]]가 힘을 합쳐도 [[위(삼국시대)|조위]]의 국력에 못 미치는 것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중세]] [[5호 16국]] 시대부터 [[한족]]들이 [[오호|북방 유목민]]에게 [[영가의 난|화북을 빼앗기고]] 대거 화남으로 이주하여 한족 [[왕조]]를 이어간 [[남북조시대]]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되었고, 이후 [[천하통일]]을 이룩한 [[수나라]] [[대운하]]의 건설, 결정적으로 [[남송]] 시대를 거치며 장강 하류의 생산력이 급상승하여 [[근세]] [[요나라|요]]-[[금나라|금]]-[[원나라|원]]의 끊임없는 유목민 [[정복왕조]]로 피폐해진 화북을 앞질렀다. 단, 비록 화남이 장강 하류 개발로 생산력이 대폭 상승했더라도 인구면에서는 화북에 비해 수배 이상 부족했기 때문에 그 차이를 메꾸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상승된 생산력은 그대로 화남의 인구를 늘리는데 투입된 것이 아니라 화북의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운송됐다. 애초에 [[대운하]]를 만들어 장강과 황하를 연결한 이유가 화남의 생산물을 화북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화북은 비교적 한랭한 평원지대라서 강이 가득한 온난한 화남보다 [[기병]] 양병이 수월했기에 여전히 남북 두 지역 간에 군사적 대결이 발생할 경우 [[명나라]], [[중화민국]] 두 번을 제외하고는 늘 화북의 승리로 끝났다. 명나라의 [[홍무제]]가 근거지 [[난징]]에 도읍을 설치했지만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가 근거지 [[베이징]]으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 이어 [[현대]]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북양정부]]를 물리치고 난징으로 [[환도]]함으로써 중국의 중추지가 화남[* 중화민국의 지역 구분으로는 [[화중]]지방]으로 이전하는듯 싶었지만 [[국공내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승리하고 중화민국이 [[대만 섬]]으로 [[국부천대|피신하면서]] 중공이 다시 베이징으로 정도하여 현재도 화북은 중국의 중추지로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