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번공주 (문단 편집) == 사례 == 다만 [[가족관계증명서]] 같은 서류가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던 옛날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실제 [[공주]]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거의 모든 경우 자기 친딸을 이민족에 인질로 보내고 싶지 않은 황제들은 종친의 여식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 [[양녀]]로 삼아 보냈고, 심지어는 아무 [[궁녀]] 하나를 잘 꾸며서 보내는 일도 있었다. [[전한]] [[원제]] 때에 [[흉노]]의 [[호한야]] 선우(왕)에게 화번공주로 간 [[왕소군]]이 대표적인 경우다. 다만 왕소군 자체는 공주로 속인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궁녀의 신분으로 보냈다. 이민족 왕들도 이들이 진짜 공주가 아님은 알고 있었으나 외교 관계로 인한 정략결혼이었으므로 그냥 그러려니 했다. [[당나라]]는 화번공주를 시집 보냄으로써 그 민족을 회유하고 주변의 다른 민족들을 견제하였으며, 화번공주를 맞아들인 민족은 군주권을 강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다. [[원나라]]도 [[고려]] 왕실에 [[공주]]들을 시집 보냈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 국왕의 제1왕비 자리는 원나라 [[공주]]들이 독점했다. 황족 출신이 아니더라도 [[몽골인]]이면 고려인보다 우선 순위가 되었다. 이들 역시 대부분 종친의 딸이고 [[충렬왕]]의 아내 [[제국대장공주]]만 대칸의 친딸이다. 그녀들은 [[친정]]의 막강한 위세를 등에 업고 횡포가 대단했고, 남편인 고려 국왕까지도 업신여겨 [[부부]] 사이도 좋지 않았다. 이들 중 단 한 사람, [[공민왕]]의 아내 [[노국대장공주]]만이 남편과 금슬이 좋았고, 남편의 반원 개혁 정책을 지지해주었다. 화번공주들은 결혼 후 이민족의 땅에 거주하며, 그곳에 중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화번공주라고 하긴 경우에 맞지 않으나 [[조선]]에서도 공주 작위를 받고 [[청나라]]에 시집 간 공주가 있다. [[의순공주]]였는데, 왕실의 먼 친척으로 당시 청나라 실세였던 [[도르곤]]에게 시집 갔다가 도르곤이 죽자 [[형사취수]] 풍습에 따라 남편의 조카와 재혼하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일찍 죽고 조선에 귀국, 안타깝게도 비참한 삶을 살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명나라]]가 강화 협상을 할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건 협상 조건 중에는 "명나라의 황녀를 [[천황]]의 [[후궁]](!)으로 보낸다"는 조건이 있었다. 차라리 [[천황]]의 정식 황후나, 혹은 실권자인 히데요시 본인의 정실 부인이었다면 명나라 측에서도 '적당한 여인을 화번공주의 형태로 보내는 것도 아주 나쁘지는 않겠는데?'라고 검토를 할 여지라도 있었다. 하지만 정실도 아니고 후궁이었으니 당연히 명나라에선 검토할 여지고 뭐고 없었고, 협상은 그대로 결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