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백회의 (문단 편집) == 외국과의 비교 ==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만장일치제 귀족회의 사례가 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도 귀족들의 "[[만장일치]]"([[리베룸 베토]])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 '[[세임]]'[* 2020년 현재 [[폴란드 의회]] 하원 이름도 세임이다.]이 있었는데, 이를 악용해 주변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의원을 매수해 폴란드 정계를 올스톱시킬 여지도 있었다(…). 그래서 1791년 스타니스와프 2세 때 5.3 [[헌법]]이 제정되며 만장일치에서 2/3 [[다수결]] 제도로 전환되었다.[* 그 외에도 입헌군주정, 세습군주정, 국왕의 자유도시, 종교의 자유, 귀족에 대한 과세, 귀족들이 농민들을 자의적으로 재판하지 못하게 하는 것, 농노제를 소작제로 전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헌법을 개정하는 당시의 의회는 아직 만장일치제라서 헌법을 가결시키는 것도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불가능했는데, 그래서 헌법이 가결될 당시 의회에는 국왕의 조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후에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싸우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폴란드의 성웅. 나폴레옹의 26인 원수 중 유일한 외국인이며, 그에 걸맞는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결국 1813년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어이없이 사망했다.]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이런 움직임을 경계한 러시아가 간섭군을 보내서 반동 세력을 지원했고, 이미 1차 [[폴란드 분할]]때 개입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끼어들면서 두 번에 걸쳐 추가 분할이 이어졌다. 이를 통해 폴란드 자체가 1795년에 [[망했어요|망하며]](…) 새로 제정한 헌법도 휴지조각이 됐다. 고대 [[러시아]]의 [[두마]]도 만장일치제였다. [[로마]]의 [[원로원]]이나 [[몽골]]의 [[쿠릴타이]] 등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