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콩섬 (문단 편집) == 역사 == [[홍콩 특별행정구]]는 홍콩 섬 외에도 [[중국 대륙]]과 연결된 [[구룡반도]], [[신계(홍콩)|신계]]가 있다. [[1842년]], [[제1차 아편전쟁]]으로 홍콩 섬이 먼저 [[영국]]령이 되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에서 현재 [[구룡반도]]의 구 [[야우침몽]] 시가지와 스톤커터스 아일랜드(石環島, 석환도)일부[* 위의 지도 14번 지역]를 새롭게 [[할양]]하였다. 마지막으로 [[1898년]], 나머지 구룡반도와 신계 지구[* 10~13번과, 파란 1~9번 영역]를 지금의 홍콩 영역을 확정했다. [[영국]]은 센트럴을 중심으로 빅토리아 시(Victoria City) 건립과 함께 총독부를 신설하였고 한동안 '''홍콩이라고 하면 홍콩 섬만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전의 홍콩 섬은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지만 [[영국]]의 동방 거점으로서 발전하게 된다. 흔히 알고 있는 99년간 조차 이후 중국에 돌려줘야 했던 땅은 1898년 제2차 베이징 조약으로 할양된 홍콩확장 세번째 신구룡과 신계 지역으로, 홍콩 섬은 원칙대로면 [[영국]]이 영구히 할양받은 땅으로서 돌려줘야만 하는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에는 이미 홍콩 시가지가 신계 북부 너머로 크게 확장되었기 때문에 그때 와서 신계 북부만 [[중국]]에 돌려주고 달랑 홍콩 섬과 구룡반도, 일부 신계[* 칭이, 췬완, 콰이충, 샤틴, 레이유문, 쿤통, 카이탁, 토카완, 마타우와이, 까우룽베이, 삼수이포 등 신계 남부지역들로 이 지역은 신구룡이라 부르며 사실상 구룡반도의 일부로 쳤다.]만 남기기는 무리였다. 비록 인구의 대부분은 이 쪽에 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홍콩 섬과 구룡 반도와 일부 신계만 [[홍콩]]으로 잔류하면 당장 [[수도(시설)|수도 시설]] 등에 차질이 생긴다. 그나마 있는 저수지, [[위성도시]] 등이 신계에 있기 때문에 [[홍콩]]이 마비될 수 있다. 즉 [[싱가포르]]가 [[조호르바루]] 없이 버텼던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1949년]] 건국과 함께 기존 국민정부, 북양정부, [[청나라]]가 체결했던 모든 외국과의 조약 중에서 오로지 중국의 입장에 유리한 조약만 승계하고 나머지는 폐기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한 상태라서 홍콩 섬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부정하고 여차하면 무력으로 회수하겠다고 위협했다.[* 1949년 당시에도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미 1949년 중국측이 중국 내 영국인 소개를 위해 파견된 영국 해군 함선에 고의적으로 선제 포격을 가해 영국 해군 장병을 사살했음에도 영국은 실질적인 군사 위협에 들어가지 못했다. 중국과 대결을 회피한 데는 [[중국 대륙]]의 새로운 주인이 된 [[중국공산당|중국 공산당]]과 원만하게 지내자는 외교적 계산도 있었지만 중국과 전쟁에 들어가 승전한다고 보장할 수 없었던 것도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미국은 냉전이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본토 관련 전쟁에 있어서는 심지어 '''우방국'''이 중국과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참전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입장은 [[6.25 전쟁]]을 겪고 나서야 부분적으로 달라졌다.] 우방국 미국은 심지어 냉전기에도 홍콩이 점령되면 같이 참전하여 [[영국]]을 도와준다는 보장을 해주지 않았다. 중국이 홍콩을 점령하지 않은 이유는 외교 및 경제 상의 이유로 홍콩 점령이 득보다 실이 컸기 때문이다. [[영국]]은 [[중국]]이 위협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의중이 없었음을 알았기에 중국 측 요구를 거부해왔지만 [[1975년]] 중국과 미국 간 핑퐁외교를 계기로 [[1976년]] 미-중 간 관계가 정상화되고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에 들어가자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못하고 협상에 임하게 된다. 영국은 협상 처음에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행정권을 영국에 위임한 형태로 통치 연장의 의사를 타진했으나 중국은 완강히 거부했고 대신 중국 측이 [[중화민국]] 시절 내놓은 식민지 반환 원칙인 [[특별행정구]] 관리 원칙에 더하여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대만 통일원칙인 1국2체제를 결합한 일국양제 반환원칙을 먼저 들고나와 결국 영국은 [[중국]]과의 친선을 위해서 홍콩 섬을 신계 북부와 같이 돌려주게 된다. 바운더리 스트리트 이북의 땅은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의 건설로 99년 조차 조항이 사실상 사문화되었고, 중국 반환 대상의 신계는 초록 택시가 들어가는 진짜 외곽의 클리어워터 베이나 사이쿵 반도, 툰문, 윈롱 등의 황무지들로 제한되었지만 이 지역들도 배후지 겸 완충지로 가치가 있었다. 아무튼 원래대로 홍콩 섬과 [[구룡반도]]만 영국이 차지했다면 지금도 홍콩 섬과 구룡반도[* 신구룡 및 신계 남부 포함] 등의 시내는 영국령이었다. 물론 땅이 좁아서 본토 쪽 [[신계(홍콩)|신계]] 북부지역들에 크게 의지해야 했을 것이고, 홍콩과 중국의 국경지대는 대혼란이 펼쳐졌을 게 뻔하다. 그래도 홍콩은 [[싱가포르]]섬과 센토사 등만 갖고 있어서 이 둘만 뚝 떨어져 독립한 [[싱가포르]]보다는 훨씬 나았다. 차라리 아래쪽 [[인도네시아]] [[리아우 제도]]라도 가져갔으면 훨씬 사정이 나았을 건데 그러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