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차 (문단 편집) === 홍차와 [[영국]] === [[유럽]]에서는 [[차]]라고 하면 홍차를 대표적으로 떠올린다. 유럽식, 정확하게 말하면 서유럽식 홍차의 역사는 [[16세기]] 중엽 [[중국]]에서 시작되는데, 본래 유럽인들이 접한 차는 반발효차인 [[오룡차]]였다. 그러나 점점 강하게 발효된 차들이 유럽인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면서, 어느새 홍차라고 하는 새로운 스타일로 굳어진 것이다. [[영국]]에 중국 홍차가 처음 소개된 건 [[포르투갈]]의 왕녀 [[브라간사의 캐서린]]이 시집 올 때 일이다. 캐서린은 영국 [[찰스 2세]](재위 1660~85)와 결혼하면서 당시 귀한 선물이었던 중국 홍차를 영국에 처음으로 가져왔다. 홍차와 관련된 한 가지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은, 영국에서 홍차로 성갈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17세기]] 당시 유럽에서는, 신문물이었던 [[커피]]가 여자와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남성들만 즐길 수 있는 음료였고, [[영국]] 위주로 남성만을 위한 [[커피하우스]]라는 [[카페]] 문화가 발달했다. 특히 상인과 선원들이 즐겨 찾던 [[로이드#s-3|로이드]] 커피 하우스는 거의 1세기 가까운 기간동안 영국의 [[증권거래소]]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상인과 선원들이 너무 무례해서 왕실 거래소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커피는 남성들에게는 활력소였다. 반면 여성들은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실 수 없었고 집에서 [[버터밀크]][* [[우유]]에서 분리한 크림층을 짜서 [[버터]]를 만들 때 버터에서 분리된 액체. 보통은 발효시켜서 [[요구르트]]처럼 시큼한 맛이 나는 게 특징.] 같은 것을 마셨다. 그러다 [[브라간사의 캐서린|포르투갈 왕녀 캐서린]]이 [[찰스 2세]]와 결혼하면서 홍차를 들고 오자, 갑자기 [[스튜어트 왕조|영국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홍차를 마시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는데, 이에 [[남성]]으로 인해 커피와 커피하우스에 반감을 가졌던 여성들이 하나 둘 홍차로 갈아타면서 그 수가 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상술했듯 커피는 여성들에게 해롭다는 말이 있었고, 굳이 [[커피하우스]]에 가지 않아도 거실 테이블에서 아름다운 [[중국]]산 [[도자기]] 찻잔 세트에다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홍차는 상류층 여성의 사교생활에 없어선 안 될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에 "남성은 커피, 여성은 홍차"라는 대립 구도가 생겼으며, 영국에서 [[자국 이성 혐오]]로 이어졌다. 여성들은 커피에 대한 좋지 않은 루머[* "[[영국]] 남자들은 커피를 마셔서 [[프랑스]] 남자보다 정력이 떨어진다!"는 등.]를 퍼뜨리기도 하였다. 한편, 몇몇 상류층과 귀족 남성들도 자기가 소유한 중국산 도자기를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욕구가 컸으므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 다음에 도자기를 자랑하는 겸 홍차를 즐기게 되고 또 이것이 귀족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자, "커피하우스는 [[Macho|선원들]]이나 가는 칙칙한 장소"라는 이미지가 생긴다. 영국이 [[식민지]] 지배와 착취로 점점 더 부강해지자, 영국 상류층들은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찻잔 세트를 뽐내며 더욱 교양있어 보이고 싶어 했으므로 결국 남성들도 태세를 전환해 모두 거실에서 홍차를 마시게 되었고, 이에 남녀 홍차 소비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자 영국은 이로서 남녀노소 홍차를 즐기게 되었고 남녀 모두 출입 가능한 '플레저 가든(Pleasure garden)' 이라는 티파티 장소가 마련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홍차가 평민들에게도 확산된 것이다. 즉, 이 시기(17세기)에 홍차와 [[애프터눈 티|티 파티]]는 영국의 대표적인 대중문화가 되었다. 18세기에는 영국의 홍차 수입으로 인해 차의 가격이 급증하고 재정이 줄어들자, 당시 [[식민지]]인 [[미국]]에 비싼 값에 강제로 팔아먹으려다 결국 [[미국인]]들의 저항으로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가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실제로는 좀 다르다. 항목 참고. 이때가 마침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에서도 [[동인도 회사]]를 세우고 식민지 경영에 나서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여 영국, 13개 식민지, [[프랑스]], [[네덜란드]]가 편 가르고 박터지게 싸우기 시작하자 국제 항로는 마비된다. 그 덕에 [[청나라]]의 개항장인 [[광저우시|광저우]]는 텅 비고 찻값은 천정부지로 폭등하는데, 오스트리아 동인도 회사는 대박을 노리고 무역선을 광저우에 파견한다. 그러나 그새 휴전이 성립됐고, 각국의 수십 척의 무역선들이 광저우로 튀어가자 대박을 노렸던 오스트리아 동인도 회사는 본전도 못 건지게 된다. 거기다 [[은]]을 실은 배가 [[아일랜드]]에서 침몰하는 바람에 대금 지불도 못 하는 상황이 되자 회사는 파산한다. 그리고 돈 못 받은 청나라는 [[신성로마제국]] 깃발을 건 배는 입항을 거부하는 조치를 내린다. 19세기에는 차의 소비량이 최고조로 급증하여, 당시 차의 주요 [[수출]]국이었던 [[청나라]]와의 무역으로 인해 영국의 무역[[적자]]가 심각해졌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대량의 [[아편]]을 반강제로 청나라에 팔아넘겨, 결국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영국이 승리하여, 난징 조약을 맺는 동시에 청나라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청나라 왕조를 무너트리는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여기서 "[[인도]]산 홍차도 충분히 맛있는데, 왜 굳이 중국산 홍차를 고집하다가 적자가 났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19세기까지 인도는 홍차를 수출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중국]]은 차의 재배법이나 제다 기술을 비밀로 취급했고, 유럽인들 역시도 차나무는 중국의 토양에서만 제대로 자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1823년에 탐험가 로버트 브루스 소령이 [[인도]]의 아삼 지방에서 새로운 차나무 품종[* 오늘날 [[아삼]]이라고 불리는 품종이다.]을 발견했고, 1848년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포춘은 중국 상인(혹은 [[몽골]] 고관)으로 변장하여 중국에서 차의 제조법을 알아내고, 중국의 기문종 홍차 묘목과 종자를 유출시켰다. 당연히 이 시기 이후, 영국은 인도에서 본격적인 홍차 재배를 시작했으며, 19세기 말 부터 인도는 본격적인 홍차 플랜테이션이 되었다. 그 후 홍차는 [[영국]] 본토 외에도 당시 영국의 [[대영제국|식민지]]였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프리카]], [[영국령 홍콩|홍콩]], [[싱가포르]]에서도 유행하게 되며, [[인도]][* 다르질링, 아삼, 닐기리가 유명하다.], [[스리랑카]][* 실론 티의 고향이다.], [[케냐]], [[탄자니아]]에 차 농장이 대거 생기기 시작했고,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프리카]]의 아열대 지역에도 차 농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프리카]], [[영국령 홍콩|홍콩]], [[싱가포르]]는 1인당 차 소비량이 높다. [youtube(uR6elY0l8RI)] [[2021년]] [[영국]]에 사는 [[미국인]] 유튜버가 물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우유를 부은 후 티백을 넣자, [[영국인]]들이 이렇게 차를 끓이는 게 아니라고 댓글[* 홍차는 [[캐나다]]의 [[메이플시럽]]처럼 영국 정부가 관리하는 핵심 품목이다. 과거 [[냉전]] 시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홍차 수급 문제가 영국의 주요 과제였고, 지금도 홍차 가격 인상은 [[영국/경제|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을 달았다. 이에 대해 카렌 피어스[* Dame Karen Pierce] 주미영국대사가 대사관 트위터 계정에 차를 올바르게 끓이는 방법에 대한 동영상을 업로드하면서 [[미영관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피어스 대사는 '''"[[미영관계]]는 [[차]]로 정의된다.[* Anglo American Relation is defined by tea]"'''를 읊은 후 [[영국 육군]] - [[영국 해군]] - [[영국 공군]] 순서대로 차 끓이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이 [[국가행정조직/영국|영국 정부]]의 과도한 차 [[관세]]로 인한 [[보스턴 차 사건]]인 걸 보면 공교롭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