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이포 (문단 편집) === 조선 === 조선의 경우 인조실록에 의하면 1630년 [[인조]]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던 정두원이 귀국할 때 처음으로 천리경(망원경), 서포(서양제 수석총), 자명종 등과 함께 홍이포 제본을 가져오면서 처음 존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실 제조는 100년 후인 1731년 영조 대다. 이 때문에 고교생용 교과서나 참고서에선 아예 정두원 이야기는 빼버리고 영조 시기 도입된 것으로 설명한다. 도면만 있고 비교할 실물이 없어 제조를 못한 채 속만 끓이고 있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다만 1653년에 남만대포라 불리우는 신형 대포가 언급되고 1664년에 강화도에 남만대포 12문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남만대포가 홍이포를 지칭하는 걸로 추정되기도 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이 홍이포를 사용해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남한산성 성채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네덜란드인으로 [[제주도]]에 표류한 벨테브레([[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 히아베르츠, 피아테르츠 등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홍이포 제작 및 조종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이후 조선 후기 내내 제작되고 운용되었다. 영조 때 훈련도감에서 홍이포 2문이 제작되었는데 탄환의 도달거리가 10여 리[* 약 4km 이상이다.]에 달하여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하기 좋을 거라고 보고하는 내용이 있으며[* 영조실록 30권, 영조 7년 9월 21일 신사 1번째 기사] 남한산성을 시찰하던 정조가 홍이포를 두고서 [[병자호란|병자년]]에 이 포를 배우지 못해 사용하지 못한 게 한탄스럽다고 하자 수어사 서명응이 그때 홍이포가 있었으면 적이 성벽으로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8일 기미 1번째 기사] 영조대 이후로도 제조 비용과 많은 화약소모, 조선군 교리 문제로 대량 배치되진 못했다. '''조선 후기 주력 화포는 엄연히 [[불랑기]], 개중에서도 소형인 4호와 5호 불랑기다.''' 화기 개발과 발전을 제한하면서까지 팔기의 궁기병을 포기하지 않았던 청을 주적으로 상정한 방어 위주 교리의 조선군에 있어 공성용 대형화포를 대량으로 보유할 동기가 떨어진 이유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