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유릉 (문단 편집) == 개요 == {{{+1 洪裕陵}}}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洪陵), [[순종(대한제국)|순종]]과 두 황후의 무덤 유릉(裕陵)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일단 능원은 따로지만 바로 옆에 붙어있기 때문에 홍유릉으로 합쳐 부른다. 소재지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남양주)|금곡동]]의 이름을 따서, 때론 '금곡릉'이라 불리기도 한다. 각 [[왕릉(무덤)|왕릉]]은 아래 목록 참조. 이 외에도 엄밀히 홍유릉에 포함된 곳은 아니지만 바로 곁에 [[영친왕]]·[[이방자]]의 묘로서 조선 왕릉[* 영친왕은 대한제국 '황제'였던 적이 없고 생전에 황태자 전하, 이왕 전하까지만 올랐기 때문에 왕릉도 황제의 격이 아니라 고종 이전의 조선왕릉들처럼 제후왕의 격식으로 영원을 조성했다.]의 격식으로 조성한 영원(英園), 그리고 회은황세손 [[이구(1931)|이구]]의 묘인 회인원(懷仁園)을 포함한 2기의 원(園) 및 [[의친왕]]·[[의친왕비]]가 합장된 의친왕묘와 [[덕혜옹주]]묘를 포함한 왕자녀의 묘 2기, 그리고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씨묘, 삼축당 김씨묘, 귀인 장씨묘, 의친왕의 첩인 수관당 정씨묘, 수인당 김씨묘를 포함한 후궁의 묘 5기가 홍유릉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어 대한제국 황실의 가족 묘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대한제국이 선포 후 2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남북한 모두 [[공화정]]이 들어섰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며, 대한제국이 황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유일한 '''황제릉(皇帝陵)'''이기도 하다.[* 한국사에서는 대한제국 이전에는 [[삼국시대]]나 [[발해]]까지는 천자/제후로 구분되는 중국식 묘제와 관련없이 토착적인 묘제를 유지하였고, [[통일신라]]나 [[고려]]는 [[외왕내제]]를 하고 왕릉의 형식에 있어서도 중국 황제릉 능원의 형식을 부분적으로 차용하긴 했지만 대한제국처럼 대내외적으로 공히 제국을 선포하고 황릉 형식을 완전하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조선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었기 때문에 다른 왕릉에 비해서 가장 최근에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홍유릉 근처에 [[광해군묘]]가 있는데 이쪽은 폐위된 까닭에 왕릉이 아니다. 또 광해군묘보다는 멀지만 같은 남양주 안에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 묘소도 화도읍에 있는데 원래 서울 공덕동에 있던 것을 남양주로 이장하였다. 비록 부자관계지만 실제로는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도 불참하였을 정도였는데 [[을미사변]] 이후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왕릉 중에서는 최초로 조선왕조 이후의 시대([[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유일한 왕릉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