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세화 (문단 편집) == 생애 == 1947년 12월 1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종로구)|이화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창경초등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금속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이듬해인 1967년 10월 자퇴했다. 이후 [[재수(입시)|재수]]를 통해 1969년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문리과대학 연극반 활동을 했으며, 1972년에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다시 복학해 8년만인 1977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무역회사 '대붕실업'에 재직하던 중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파리 지사 근무 중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프랑스에서 20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보면, 처음 발급받은 망명자 신분증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다. '갈 수 있는 나라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이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프랑스 이민국의 망명 담당자가 했던 질문이란 게 "당신은 그저 당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명한 것뿐인데[* 홍세화씨 본인이 제출한 신문자료와 달리 면담에선 자신은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하자 앞뒤가 안 맞지 않다며 물어본 거라고 한다.] 왜 이게 문제가 되느냐?" 이에 대한 홍세화의 대답은 '''"그렇게 하면 잡혀가니까..."''' 이후 한동안 파리에서 택시기사 생활을 했다.[* 남민전은 이적단체 논란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으나, 남민전 사건은 엄연히 법원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은 사건이다.[[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3n3208n11|#]],[[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5230&cid=43667&categoryId=43667|#]],[[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5030&cid=40942&categoryId=31778|#]] 이념논쟁을 떠나서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학생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비인륜적인 수사를 한건 사실이고 이게 옳다고 볼 순 없다. [[남민전 사건]] 참조. 그러나 [[사노맹]] 사건 등 엄연히 극좌적 지하당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까지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히 탈냉전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남민전이 이적단체나 극좌 단체였던 사실 자체가 뒤집히는건 아니며 이 사건의 관계자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민투위 강도 사건|강도와 상해]]를 벌이는 등 이념을 떠나서 범죄 활동까지 벌였기 때문에 다른 공안 사건들과 다르게 볼 여지도 있는것도 사실이다.판단은 알아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당시엔 인터넷도 없고 해외여행 자유화도 막 되던 시기라 아직 해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프랑스와 유럽 상황을 신속히 전달하는 언론인 역할도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택시기사 생활 경험과 프랑스 사회에 대한 소개, 본인의 성장기와 한국 사회의 과제를 담은 1995년작[* 2006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름을 날렸다. 그 후 1999년에 귀국하고 2002년 1월에는 영구귀국했다.[* 단, 아주 어려서부터 프랑스에서 살아온 그의 딸과 아들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해 그곳에 남았고, 아내는 한국과 프랑스를 왔다갔다한다고. 한국 국적의 홍세화가 한국에 오지 못하는 동안, 프랑스 국적의 딸은 한국학을 전공한 뒤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귀국과 동시에 [[한겨레]]에 입사했다.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3671|#]] 그 후 한국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 '''2002년''' 3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2월 5일, [[민주노동당]] 측 패널로 MBC 100분토론에 출연했다가 회사(한겨레)에서 징계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언론인들의 중립성과 개개인의 양심과 관련한 여러 논의가 일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2259?no=42259|당시 기사]] ----- '''2008년''' 2월 5일,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 탈당 사유로 '오늘의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http://www.redian.org/archive/16242|기사]] [[http://www.redian.org/archive/19869|탈당의 변]] ----- '''2011년''' 11월 25일, [[진보신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http://www.laborparty.kr/index.php?mid=bd_notice&page=96&document_srl=439864|#]] -----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신당 비례대표 2번으로 출마했지만, 당의 득표율이 3%를 넘지 못해 낙선했다. ----- '''2012년''' 10월 27일, [[진보신당]]의 상임대표 직에서 사퇴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8065|기사]] 이후엔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회단체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으로 재직 중이다. ----- '''2018년''' [[김길오]] 등이 연루된 '[[노동당(대한민국)|노동당]] 언더조직 폭로 사건'과 관련해서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http://www2.laborparty.kr/bd_member/1756873|#]] ----- '''2020년''' 2월 14일 [[더불어민주당]]의 임미리 교수 비판 칼럼 고발 사건에 관해 "민주당은 [[자유한국당]]보다 배타적이며 비관용적"이라며 비판했다. [[http://redpill.kr/index.php?document_srl=1603&fbclid=IwAR171Nut3uxhIjadRpfltPLSRqvcfQ5gh1RKXalghFbcUSN2vxtlezkTRRk%E2%88%A3%3Dcolumn&mid=column|#]] ----- '''2021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를 "내용은 없고 수사(꾸미고 다음어진 말)만 있는 정부", "남은 임기 동안에도 임금님이 아닌 대통령으로 돌아오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288|#]] ----- '''2022년'''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현재는 [[대연정|스페인 포데모스 식의 선거 연합]]이 불가능한 구조다.[* 일단 총선에서 ''''어느 당이 이기든지'''', ''''어느 쪽 후원자들이 더 부유한지?'''' 여부와 무관하게, 절대다수의석 정당이 출현하기 어려운 선거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수많은 이권과 옥사(獄事)까지 다룰 권한이 주어지는 정계(政界)인만큼, 이 정도 상황은 되어야, 자의 반 타의 반 협의(協議)에 나선다는 것.] 칠레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도, 5년 전 한국의 촛불보다 좀 더 강한 저항을 통해 제헌의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개헌 정도로는 안 된다. 지금의 구조는 과도한 기득권 중심의 금권 정치다. 정당법이나 선거법에 의해 소수 정당이 약진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혀있다'라는 발언으로 기존의 소수 독점식 선거 제도를 비판하였다. 또한 [[이백윤]] 후보와 [[사표론]]에 대해 '이백윤 후보가 얻는 표만큼 사회가 변화할 가능성이 커진다. 민주당이 다급해지면서 결선투표제 이야기를 꺼냈다. 결선투표를 실시하는 프랑스에서는 절대 사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1차 투표는 사표 걱정 없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기 때문에, 그것의 분포가 사회 구성원의 정치지형을 그대로 드러낸다. 결선투표제가 없는 현재 상황에서, 이백윤 후보의 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이만큼 지지를 받았구나’라는 가능성이 될 것이다. 이번 사회주의 대선 후보의 출마는 사회주의의 씨앗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http://m.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6565|#]] 11월 3일 녹색당에 입당하여 현재 이중당적을 갖고 있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teachme88&logNo=222918661955&categoryNo=62&proxyReferer=|#]]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