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성담 (문단 편집) == 생애 ==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지고 난 뒤에 독일, 일본, 미국, 스웨덴 등에서 광주에 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한데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릴 시각매체라고는 신문 보도사진 말고는 없어요. 그래서 판화 작업을 한 겁니다. 그 때문에 나를 일러 '5월 화가'라고 하는데, 그 땐 작품이 아니라 '운동의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홍성담은 1955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나 [[목포고등학교]]을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78년 그는 결핵에 걸려 [[무안군]] 지역의 요양소에서 지냈는데, 그곳에서 [[윤한봉]]과 [[김남주(시인)|김남주]] 등 반유신운동을 펼치던 전남 지역 [[운동권]] 인물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홍성담은 결핵 치료 이후 '광주자유미술인협회(광자협)'를 결성하여 민주화운동과 문화예술운동에서 활동했다. 특히 1980년에 발생한 [[5.18 민주화운동]]은 그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그는 25세였는데,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으며[* 1980년 5월 21일에 발생한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를 직접 목격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와 주변인들이 총에 맞은 한 사람을 구조했는데, 그 사람은 배에 총을 맞아 창자가 빠져나온 상태였다. 헌데 창자에 아직 다 소화되지 않은 보리밥알이 햇볕을 쐬며 반짝거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5.18]]을 떠올리면 아직도 그 보리 밥알이 생각난다고 한다.] 선전조로 활동했고, 이 사건을 통해 [[민중미술]]에 더욱 더 관심을 가지고 뛰어들게 된다. 이후 그는 '''[[판화]]를 제작하면서 5.18과 관련된 장면들을 그려냈고, 그 그림들은 나중에 [[http://myarts.kr/web/artistView/CTN_ATST20150519162425vErfhXmc|<새벽>]][* 이 판화는 총 50점의 판화로 구성되어 있다.][* 링크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연보라색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화 연작 <새벽>의 작품이다. ~~고화질이라서 보기 좋다.~~]이라는 판화 연작이 되어 5.18을 대표하는 그림이 된다.''' 1985년에는 [[민중미술]]을 담당하는 예술가들의 단체인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1987년 [[6월 항쟁]] 때도 5.18처럼 선전조로 활동했다. 1988년에는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연)'를 결성했다. 1989년, 홍성담은 민미연 산하 예술가들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연작 걸개 그림을 그리는데 참여했다. 이 그림은 한국 근현대사를 11개 부문으로 나누어 그린 대형 걸개그림이었는데, 전체 그림을 이으면 세로 2.5m, 가로 77m인 [[대작]]이었다.[* 이 작품들은 전국의 대학과 시위 장소에 내걸렸는데, 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집회에서 경찰이 허락도 없이 소각해버렸다. 다행히도 그림들을 찍은 슬라이드 필름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촬영한 슬라이드 필름이 평양에서 개최된 축전에 전시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안기부]]와 검찰은 홍성담이 그린 그림을 문제 삼았다. 홍성담은 광주민중항쟁도'라는 5.18을 다룬 그림을 직접 그렸는데, 공안당국은 그 그림이 "반미, 반파쇼, 반봉건 투쟁의 시각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으로 형상화하여 제작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주장과 활동에 동조"했다면서 트집을 잡았다. 홍성담은 이 일로 잡혀가 물고문까지 당했으며[* 그는 자신을 고문한 고문기술자의 얼굴을 익혀두었다가 나중에 몽타주를 그려서 공개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110900289111010&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89-11-09&officeId=00028&pageNo=11&printNo=460&publishType=00010|#]] 비슷한 사례로 1986년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연행되어 고문당한 심진구(1960~2014)도 [[정형근]] 등 고문수사관 5명의 몽타주를 그렸다.] 간첩으로 몰렸다. 다행히 인권변호사들이 적극적으로 변호를 해주고, 국내외 각지에서 구명 운동[* 대표적으로 [[국제앰네스티]]가 1990년 홍성담을 '올해의 양심수' 3인 중 하나로 선정하였다.]이 일어나 간첩죄 등에서는 무죄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이적표현물 제작에 있어서는 유죄 판결을 받아야 했다.[* 놀라운 것은 이 때 대법원 주심대법관이 [[이회창]]이었다!] 이후 홍성담은 지속적으로 [[민중미술]]와 관련된 작품들을 그리며 활동했다. 가나아트센터, 학고재 화랑, 독일 행체화랑 등 여러 곳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광주 북구청에 대형 벽화를 그려 설치하기도 했다. 또 [[물고문|정치]][[한국 민주화운동|사회]][[독재|에서]] [[야스쿠니 신사|벌어]][[일본군 위안부|지는]] [[5.18 민주화운동|사]][[용산 참사|건]][[세월호 참사|사]][[박근혜-최순실 게이트|고]]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사회참여적인 성격을 띠었고, 상황에 따라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극심한 논쟁을 몰고 오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2005년 결혼하였고, 현재는 [[안산시]]에서 작업장을 차려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 여담으로 그가 안산에 정착해서 작업장에서 겪은 일이 하나 있다. 당시 그의 작업장은 [[단원고등학교]] 옆에 있었기에 그 학교의 학생 2명이 와서 작업장의 일을 돕는 알바를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세월호 참사]] 당시에 목숨을 잃었다. 놀란 그는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갔는데 거기서 그 학생의 시신이 인수되는 것을 학생의 가족들과 함께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진 정부의 실책들을 목격하며 [[세월호 참사]]와 [[5.18]]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https://youtu.be/ce-F_3_Xlkw|실제 증언]] 나중에 홍성담은 세월호를 다룬 [[http://star.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277507|연작]]을 그려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